일반 “기도로 물든 일상” (기도학교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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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029회 작성일 20-07-12 23:10본문
1. 기도의 나침반과 지도
처음 오른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홀로 정상까지 도착하곤 그저 아래로만 내려갔다. 곧장 아래로만 내려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다 내려가고 보니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돌아와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의 다른 쪽 마을로 내려간 것이다.
그날 산은 지름길이 무엇인지 새롭게 가르쳐 줬다. 산을 내려가지만, 오르막을 오를 때가 있고, 곧장 가지 않고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때론 돌아가거나 반대로 가야 지름길이다. 무조건 아래로만 가면 길을 잃듯이, 무조건 간절히 구하기만 해도 길을 잃는다. 바라던 응답을 받아도 하나님을 잃을 수 있다. 기도의 숲에서 오래 동안 길을 잃고 헤맨 이유다.
중학교1학년, 그 즈음이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진지한 기도를 시작했고 이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성경의 도처에 기도와 간구를 구별해 말하건만(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빌4:6), 그저 간구가 기도의 전부인줄로만 알았다. 간구보다 넓고 깊은 기도를 몰랐던 것이다. 눈물, 콧물이 범벅되도록 자책하고 간구하는 기도, 소위 나무 하나 뽑는 기도쯤 되어야 충만한 기도로 알았다.
더 뜨겁고 더 간절한 기도! 더, 더, 더…. 그러나 더 간절히 기도해도 일상은 과거로 쉬 되돌아갔고, 기도가 뜨거웠던 만큼 일상과의 괴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기도원에 들어가 홀로 금식기도로 부르짖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만큼 헛헛함도 컸다. 무조건 아래로만 내려가다가 수없이 길을 잃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방향이 틀린 줄은 모르고 열심이 부족한 줄로만 알았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은 신대원 시절 처음 접한 센터링기도에서다. 중고생 시절 접한 단전호흡과 대학시절 접한 참선에 끌리던 차에 기독교에서도 그와 비슷한 기도를 만난 것이다. 그 뒤로 혼자 책들을 의지해 센터링기도와 예수기도, 렉시오디비나, 성찰기도를 십 수 년 해왔다. 꾸준하지 못한 간헐적 기도여서일까, 책으로 혼자 배운 탓일까? 짧지 않은 세월이건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좋은 점이 분명 있었고 힘겨운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기도를 통해서 다른 신앙의 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만족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그저 하나님께 자신을 다 드리는 기도로 부족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내게 맞지 않는 기도가 아닐까, 이제 그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의 숲속에서 길을 잃은 듯하던 차에 침묵기도학교를 시작했다.
8주 과정을 마치고 돌아보니, 지도 한 장과 나침반을 선물 받은 것만 같다. 어디에서 왜 맴돌고 있었는지 전체 지형 속에서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길을 잃을 때 어떻게 길을 찾을지, 나침반 바늘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통합심리학, 스펙트럼 심리학으로 유명한 켄 윌버, 그는 동서양의 다양한 심리학들에서 종교의 수행들에 이르는 수많은 관점을 하나의 지도 안에 그려 넣었다. 빛을 스펙트럼으로 나누어 다양한 색깔의 위치와 관계를 보여주듯, 서로 다른 관점이 각기 어디에 위치하고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테면, 융을 적용할 때와 프로이트를 적용할 때 구분하고, 간구할 때와 침묵할 때를 구분해주는 식이다.
침묵기도학교 역시 기도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준다. 능동적으로 상상하고 말하는 기도에서 수동적으로 모든 것을 놓아 보내며 침묵하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도를 하나의 흐름 안에서 보여준다. 서로 다른 기도가 각기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때,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할지 그 맥락을 일깨운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기도를 알아보게도 하지만, 일상의 맥락에 따라 어떻게 기도할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은 일상의 모든 것을 기도로 물들이는 길을 열어준다. 모든 것이 기도가 되는 여정의 지도와 나침반을 선사해준 것이다.
2. 기도로 깨어난 모든 것
영혼의 방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도를 처음 실습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간 센터링기도처럼 흘려보내고 내려놓는 부정의 길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니 다른 길이 열렸다. 주님을 내 영혼의 방으로 모시는 상상이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놀라웠고 뭉클했고 애틋했다고 할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기도가 끝나 눈을 뜨고 돌이켜 봤다. 하나님께서 늘 곁에 계심을 진정 느꼈다면, 이렇게 놀랍고 감격적일 수 있을까? 믿는다고 말했지만 생생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영혼의 방, 복음관상기도, 시편기도…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런 기도들은 일상의 상상력을 정화해주었다. 사실 일상은 이미 수많은 상상으로 가득 차있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상상이 얼마나 많던가. 특히 교회는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외치며, 믿은 대로 이뤄진다고 의심 없이 상상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 함께 계시다는 진리는 왜 상상하지 않는가. 불안하고 두려운 일, 집착하고 욕망하는 일은 그리도 실감나게 상상하면서 왜 하나님의 임재는 그리도 등한히 했던가. 무엇을 어떻게 상상해야할지 돌아보게 한다.
복음관상기도나 영혼의 방 기도가 상상력의 정화였다면, 이콘기도는 시선을 정화해주었다. 가장 낯선 기도였던 만큼 가장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방정교회 전통의 이콘을 볼 때 낯설고 거북하다 못해 두렵게 느끼는 이도 있다. 처음 접한 이콘 속 주님의 얼굴은 낯설다 못해 기이했다. 좌우가 다르다. 한쪽은 위를 보고 다른 쪽은 아래를 본다. 한쪽은 엄해 보이고 한쪽은 온유해 보인다.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섞인 그 얼굴,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는 얼굴, 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색함과 혼란스러움이 분심을 일으킨다. 그러나 뒤엉키는 분심들을 그대로 놓아 보낸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에 자신을 열어 맡기고 또 맡긴다. 기도를 마칠 때, 눈을 감고 주님의 시선을 가슴 깊이 모셔오고, 다시 눈을 뜨면서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겨우 일주일의 연습이었지만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분심을 흘려보내고 주님의 시선으로 돌아가 맡기는 연습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가져왔다. 누군가를 마주할 때, 혹은 숲과 자연을 바라볼 때, 문득 주님의 시선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눈으로 바라본다. ‘주님 어떻게 보이시나요.’ 가슴속에 기도가 깨어났다. 편치 않았던 사람을 마주할 때, 판단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판단과 상념을 놓아 보내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기도 한다. 정화된 시선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고백하고 믿는다. 그러나 타자에게서,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보일까? 거울을 보고 드리는 이콘기도도 해봤다. 자기 얼굴을, 자기 눈을 바라보며, 하나님 시선에 열어 맡긴다. 자신에 대해 용서하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와도 동일하다.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감정과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그리고 자신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의 눈으로 본다. 자기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시선을 만난다.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이 오롯이 하나님만을 볼 때, 모든 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이 된다.” “내가 하나님을 보는 눈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눈은 동일하다. 내 눈과 하나님의 눈은 하나의 눈이며, 하나의 봄이며, 하나의 인식이며 하나의 사랑이다.”(마틴 레어드, 『침묵수업』, 32,33 재인용) 엑카르트의 이 알 듯 모를 듯 했던 말이 일상의 경험으로 깨어났다.
상상력과 시선의 정화뿐만이 아니다. 침묵기도학교에서 수련하는 기도들은 일상전체를 포괄하고 있었다. 가장 능동적인 형태에서부터 가장 수동적인 형태에 이르는 다양한 기도가 일상을 물들였다. 그 하나하나를 익히고 연습할 때, 기도로 물들지 않을 게 없었다. 침묵이 기도가 되었고, 호흡, 발걸음, 노동, 상상, 시선, 흥얼거림, 심지어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다 기도가 될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활동과 현존에 동의하는 지향은 낯설지 않은 기도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그대로 놓아 보내며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접했다. 가장 수동적인 센터링기도의 길이었다.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떠올릴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 드리는 지향이다. 그런데 거룩한 단어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지향의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뿐 아니라 소리, 몸짓, 호흡, 시선, 향기, 맛 그 무엇도 다 사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일상이, 삶이 기도가 되는 길이 드러났다.
‘삶이 예배다. 삶이 기도다.’ 무척이나 흔한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예배고 기도인지는 얼마나 알고 있던가? 삶이 예배고 기도라면서, 자신을 속이는 욕망과 두려움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투사하면서도 그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곤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거룩한 것으로 타자에게 폭력을 자행한다. 진정 삶이 예배가 되는 길, 일상이 기도가 되는 길이 절실한 이유다.
번영신학을 수없이 비판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변화가 드문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번영신학은 번영을 위한 기도를 낳는다. 간구하고 매달려 결국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기도, 아니 그것이 기도인가, 조종인가. 번영신학을 비판하기만 하고, 기도는 여전히 간구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 변화는 요원하다. 간구하고 매달려 하나님을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부인하고) 하나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절실하다.
하나님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일상을 물들일 때, 하나님 뜻을 온 삶으로 행하는 기도가 몸짓까지 물들일 때, 번영신학은 자연스레 시들 것이다. 호흡, 시선, 몸짓, 노동, 소리… 일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일깨우는 상징이라면, 어찌 달라지지 않겠는가. 호흡, 시선, 몸짓, 노동, 소리… 일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 아닌 어디겠는가. 기도로 물든 시선에 일상은 이미 하나님 나라다.
(하태혁 목사 - 단해교회)
처음 오른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홀로 정상까지 도착하곤 그저 아래로만 내려갔다. 곧장 아래로만 내려가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다 내려가고 보니 전혀 모르는 동네였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돌아와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의 다른 쪽 마을로 내려간 것이다.
그날 산은 지름길이 무엇인지 새롭게 가르쳐 줬다. 산을 내려가지만, 오르막을 오를 때가 있고, 곧장 가지 않고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때론 돌아가거나 반대로 가야 지름길이다. 무조건 아래로만 가면 길을 잃듯이, 무조건 간절히 구하기만 해도 길을 잃는다. 바라던 응답을 받아도 하나님을 잃을 수 있다. 기도의 숲에서 오래 동안 길을 잃고 헤맨 이유다.
중학교1학년, 그 즈음이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 진지한 기도를 시작했고 이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성경의 도처에 기도와 간구를 구별해 말하건만(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빌4:6), 그저 간구가 기도의 전부인줄로만 알았다. 간구보다 넓고 깊은 기도를 몰랐던 것이다. 눈물, 콧물이 범벅되도록 자책하고 간구하는 기도, 소위 나무 하나 뽑는 기도쯤 되어야 충만한 기도로 알았다.
더 뜨겁고 더 간절한 기도! 더, 더, 더…. 그러나 더 간절히 기도해도 일상은 과거로 쉬 되돌아갔고, 기도가 뜨거웠던 만큼 일상과의 괴리는 더 크게 느껴졌다. 기도원에 들어가 홀로 금식기도로 부르짖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만큼 헛헛함도 컸다. 무조건 아래로만 내려가다가 수없이 길을 잃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방향이 틀린 줄은 모르고 열심이 부족한 줄로만 알았다.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은 신대원 시절 처음 접한 센터링기도에서다. 중고생 시절 접한 단전호흡과 대학시절 접한 참선에 끌리던 차에 기독교에서도 그와 비슷한 기도를 만난 것이다. 그 뒤로 혼자 책들을 의지해 센터링기도와 예수기도, 렉시오디비나, 성찰기도를 십 수 년 해왔다. 꾸준하지 못한 간헐적 기도여서일까, 책으로 혼자 배운 탓일까? 짧지 않은 세월이건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좋은 점이 분명 있었고 힘겨운 때마다 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기도를 통해서 다른 신앙의 길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만족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고, 아무 것도 얻지 못해도 그저 하나님께 자신을 다 드리는 기도로 부족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내게 맞지 않는 기도가 아닐까, 이제 그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도의 숲속에서 길을 잃은 듯하던 차에 침묵기도학교를 시작했다.
8주 과정을 마치고 돌아보니, 지도 한 장과 나침반을 선물 받은 것만 같다. 어디에서 왜 맴돌고 있었는지 전체 지형 속에서 맥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길을 잃을 때 어떻게 길을 찾을지, 나침반 바늘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통합심리학, 스펙트럼 심리학으로 유명한 켄 윌버, 그는 동서양의 다양한 심리학들에서 종교의 수행들에 이르는 수많은 관점을 하나의 지도 안에 그려 넣었다. 빛을 스펙트럼으로 나누어 다양한 색깔의 위치와 관계를 보여주듯, 서로 다른 관점이 각기 어디에 위치하고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를테면, 융을 적용할 때와 프로이트를 적용할 때 구분하고, 간구할 때와 침묵할 때를 구분해주는 식이다.
침묵기도학교 역시 기도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여준다. 능동적으로 상상하고 말하는 기도에서 수동적으로 모든 것을 놓아 보내며 침묵하는 기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도를 하나의 흐름 안에서 보여준다. 서로 다른 기도가 각기 어디에 위치하는지, 어떤 때,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할지 그 맥락을 일깨운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기도를 알아보게도 하지만, 일상의 맥락에 따라 어떻게 기도할지도 보여준다. 그리고 결국은 일상의 모든 것을 기도로 물들이는 길을 열어준다. 모든 것이 기도가 되는 여정의 지도와 나침반을 선사해준 것이다.
2. 기도로 깨어난 모든 것
영혼의 방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도를 처음 실습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간 센터링기도처럼 흘려보내고 내려놓는 부정의 길에 치우쳐 있었다. 그런데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니 다른 길이 열렸다. 주님을 내 영혼의 방으로 모시는 상상이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놀라웠고 뭉클했고 애틋했다고 할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눴다. 기도가 끝나 눈을 뜨고 돌이켜 봤다. 하나님께서 늘 곁에 계심을 진정 느꼈다면, 이렇게 놀랍고 감격적일 수 있을까? 믿는다고 말했지만 생생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영혼의 방, 복음관상기도, 시편기도…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런 기도들은 일상의 상상력을 정화해주었다. 사실 일상은 이미 수많은 상상으로 가득 차있다. 미래와 과거에 대한 상상이 얼마나 많던가. 특히 교회는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외치며, 믿은 대로 이뤄진다고 의심 없이 상상하게 했다. 그런데 하나님 함께 계시다는 진리는 왜 상상하지 않는가. 불안하고 두려운 일, 집착하고 욕망하는 일은 그리도 실감나게 상상하면서 왜 하나님의 임재는 그리도 등한히 했던가. 무엇을 어떻게 상상해야할지 돌아보게 한다.
복음관상기도나 영혼의 방 기도가 상상력의 정화였다면, 이콘기도는 시선을 정화해주었다. 가장 낯선 기도였던 만큼 가장 새로운 경험이었다. 동방정교회 전통의 이콘을 볼 때 낯설고 거북하다 못해 두렵게 느끼는 이도 있다. 처음 접한 이콘 속 주님의 얼굴은 낯설다 못해 기이했다. 좌우가 다르다. 한쪽은 위를 보고 다른 쪽은 아래를 본다. 한쪽은 엄해 보이고 한쪽은 온유해 보인다. 남성과 여성,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섞인 그 얼굴,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는 얼굴, 그 눈빛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색함과 혼란스러움이 분심을 일으킨다. 그러나 뒤엉키는 분심들을 그대로 놓아 보낸다. 그리고 주님의 시선에 자신을 열어 맡기고 또 맡긴다. 기도를 마칠 때, 눈을 감고 주님의 시선을 가슴 깊이 모셔오고, 다시 눈을 뜨면서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겨우 일주일의 연습이었지만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분심을 흘려보내고 주님의 시선으로 돌아가 맡기는 연습이 일상에 작은 균열을 가져왔다. 누군가를 마주할 때, 혹은 숲과 자연을 바라볼 때, 문득 주님의 시선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눈으로 바라본다. ‘주님 어떻게 보이시나요.’ 가슴속에 기도가 깨어났다. 편치 않았던 사람을 마주할 때, 판단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판단과 상념을 놓아 보내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기도 한다. 정화된 시선으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고백하고 믿는다. 그러나 타자에게서, 그리고 누구보다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보일까? 거울을 보고 드리는 이콘기도도 해봤다. 자기 얼굴을, 자기 눈을 바라보며, 하나님 시선에 열어 맡긴다. 자신에 대해 용서하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와도 동일하다.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 감정과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그리고 자신 안에 함께 계신 주님의 눈으로 본다. 자기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시선을 만난다.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이 오롯이 하나님만을 볼 때, 모든 것은 당신에게 하나님이 된다.” “내가 하나님을 보는 눈과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눈은 동일하다. 내 눈과 하나님의 눈은 하나의 눈이며, 하나의 봄이며, 하나의 인식이며 하나의 사랑이다.”(마틴 레어드, 『침묵수업』, 32,33 재인용) 엑카르트의 이 알 듯 모를 듯 했던 말이 일상의 경험으로 깨어났다.
상상력과 시선의 정화뿐만이 아니다. 침묵기도학교에서 수련하는 기도들은 일상전체를 포괄하고 있었다. 가장 능동적인 형태에서부터 가장 수동적인 형태에 이르는 다양한 기도가 일상을 물들였다. 그 하나하나를 익히고 연습할 때, 기도로 물들지 않을 게 없었다. 침묵이 기도가 되었고, 호흡, 발걸음, 노동, 상상, 시선, 흥얼거림, 심지어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다 기도가 될 수 있었다.
이미 하나님의 활동과 현존에 동의하는 지향은 낯설지 않은 기도다. 어떤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그대로 놓아 보내며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방식으로 접했다. 가장 수동적인 센터링기도의 길이었다. 거룩한 단어를 부드럽게 떠올릴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열어 드리는 지향이다. 그런데 거룩한 단어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될 수 있는지를 몰랐다. 지향의 상징으로 거룩한 단어뿐 아니라 소리, 몸짓, 호흡, 시선, 향기, 맛 그 무엇도 다 사용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일상이, 삶이 기도가 되는 길이 드러났다.
‘삶이 예배다. 삶이 기도다.’ 무척이나 흔한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예배고 기도인지는 얼마나 알고 있던가? 삶이 예배고 기도라면서, 자신을 속이는 욕망과 두려움에 끌려 다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욕망과 두려움을 투사하면서도 그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곤 한다. 스스로를 속이고 거룩한 것으로 타자에게 폭력을 자행한다. 진정 삶이 예배가 되는 길, 일상이 기도가 되는 길이 절실한 이유다.
번영신학을 수없이 비판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변화가 드문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번영신학은 번영을 위한 기도를 낳는다. 간구하고 매달려 결국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하는 기도, 아니 그것이 기도인가, 조종인가. 번영신학을 비판하기만 하고, 기도는 여전히 간구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때, 변화는 요원하다. 간구하고 매달려 하나님을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기를 비우고(부인하고) 하나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절실하다.
하나님 주시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가 일상을 물들일 때, 하나님 뜻을 온 삶으로 행하는 기도가 몸짓까지 물들일 때, 번영신학은 자연스레 시들 것이다. 호흡, 시선, 몸짓, 노동, 소리… 일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일깨우는 상징이라면, 어찌 달라지지 않겠는가. 호흡, 시선, 몸짓, 노동, 소리… 일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 아닌 어디겠는가. 기도로 물든 시선에 일상은 이미 하나님 나라다.
(하태혁 목사 - 단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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