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샬렘 영성 편지 (2020년 10월 19일) - '내가 지금 이 순간 큰 생명의 흐름속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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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868회 작성일 20-10-20 16:31본문
아침 식탁에 앉았는데 라디오에서 불란서의 국민가수 에디트 삐아프의 일생이 소개되면서 애절한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던 옛날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편리한 핸드폰 덕분에 궁금한 노랫 가사를 검색해 보았다. ‘사랑의 찬가’중 가사의 일부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세상일은 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처 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길로 떨고 있는 한
그 어떤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 사랑 당신이 날 사랑하니까.
에디트 삐아프는 1915년 파리의 사창가 지역에서 태어나 포주인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어려울 땐 성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는데 뛰어난 노래 실력 때문에 점차 유명해져서 20세기 불란서를 대표하는 국민가수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위로하는 큰 힘이 있었다고 한다. 알콜 중독과 마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여러 남자와의 염문과 몇 번에 걸친 결혼 때문에 성당의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바람에도 불구하고 47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카톨릭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식탁에서 같이 듣고 있던 아내에게 묻는다.
‘저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아내가 되묻는다.
‘그런데 교회는 왜 그렇게 편을 가르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거지?’
‘그거야 다 제도 때문이지요.’
그렇다. 지금은 하나님을 제도와 조직의 울타리 안에, 혹은 성당이나 예배당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을 자기집단만이 소유하고 있는양 우겨대는 세상이다. 어디 지금뿐이겠는가? 이단이니 정통이니 시비를 걸며 서로 죽이면서 피를 흘리고 싸운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소속집단의 생존 욕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 될 때 사람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선을 긋고 장벽을 높이 쌓아올린다. 그리고 분노와 차별과 증오로 상대방을 저주하는 것이다. 마침내 상대방을 죽어야 하는 악의 집단으로 낙인찍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도 로마의 권력과 유대 종교인들에 의해 낙인찍히고 거부당하신 분이다.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질서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은퇴 후에 비로소 나는 자유롭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새로운 신앙의 길을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때로는 나 자신도 궁금해 질 때가 있다. 내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바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내 평생 나도 모르게 붙잡혀 온 무의식적 생존욕구와 인정욕구를 넘어 서서 자유로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의 흐름 속에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잘 인식하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생태계의 신음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주님과 함께 아파하며 더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큰 생명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그 생명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가끔은 큰 자유로움과 기쁨을 맛보는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요한 15장5절)
( 박경조 주교, 한국샬렘 공동대표)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로 무너진다 해도
모든 대지가 허물어진다 해도
만약 당신이 나를 사랑해 주신다면
세상일은 나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처 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길로 떨고 있는 한
그 어떤 일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 사랑 당신이 날 사랑하니까.
에디트 삐아프는 1915년 파리의 사창가 지역에서 태어나 포주인 할머니 손에서 자라났다. 어려울 땐 성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는데 뛰어난 노래 실력 때문에 점차 유명해져서 20세기 불란서를 대표하는 국민가수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의 삶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며 위로하는 큰 힘이 있었다고 한다. 알콜 중독과 마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여러 남자와의 염문과 몇 번에 걸친 결혼 때문에 성당의 묘지에 묻히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바람에도 불구하고 47세의 나이로 요절한 그녀를 카톨릭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식탁에서 같이 듣고 있던 아내에게 묻는다.
‘저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아내가 되묻는다.
‘그런데 교회는 왜 그렇게 편을 가르고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거지?’
‘그거야 다 제도 때문이지요.’
그렇다. 지금은 하나님을 제도와 조직의 울타리 안에, 혹은 성당이나 예배당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가두어 놓고 하나님을 자기집단만이 소유하고 있는양 우겨대는 세상이다. 어디 지금뿐이겠는가? 이단이니 정통이니 시비를 걸며 서로 죽이면서 피를 흘리고 싸운 교회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소속집단의 생존 욕구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 될 때 사람들은 선악의 이분법으로 선을 긋고 장벽을 높이 쌓아올린다. 그리고 분노와 차별과 증오로 상대방을 저주하는 것이다. 마침내 상대방을 죽어야 하는 악의 집단으로 낙인찍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도 로마의 권력과 유대 종교인들에 의해 낙인찍히고 거부당하신 분이다. 자신들이 속한 집단의 질서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은퇴 후에 비로소 나는 자유롭게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새로운 신앙의 길을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게 될지 때로는 나 자신도 궁금해 질 때가 있다. 내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하나님의 현존하심과 활동하심에 동의하며 주님을 향한 나의 사랑을 바치면 나는 어떻게 될까?
내 평생 나도 모르게 붙잡혀 온 무의식적 생존욕구와 인정욕구를 넘어 서서 자유로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모든 존재는 다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의 흐름 속에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좀 더 잘 인식하게 될까?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생태계의 신음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을까? 그래서 주님과 함께 아파하며 더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큰 생명의 흐름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그 생명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가끔은 큰 자유로움과 기쁨을 맛보는 은혜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이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요한 15장5절)
( 박경조 주교, 한국샬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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