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8월 넷재주간 샬렘영성편지 - 찬란한 부재, 그리고 그 현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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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983회 작성일 20-08-24 08:02본문
찬란한 부재, 그리고 그 현존 앞에서
언제부터인가 음성으로 하는 기도가 내 입에서 사라졌다. 그토록 통성기도, 방언기도,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로 주님을 만났던 나였는데 어느새 내 입술은 소리없이 아니 그런 기도가 낯설고 5분을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냥 누워서도 하고, 뒹굴뒹굴 하면서도 ‘주님’을 불렀으니까.
그러나, 내 마음엔 기도가 아니었다. ‘이건 기도가 아니야’ 라며 내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한 듯하여 불안하고, 부끄럽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다가 만난 샬렘 침묵기도학교.
침묵과 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있기.
낯설기도 하고, 소위 요즘 뜨고 있는 명상같기도 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게 맞어?’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었다. 예전에 들어보았던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고 생각하여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주위의 가족들도 ‘우리 엄마가 수상하다(?)’며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지켜보았다.
1~2주는 내 몸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힘이 들었다. 자꾸 벨소리를 기다리게 되고 눈이 감기고 분심과 잡념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도 시간 만큼은 지키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일과가 훨씬 더 단순해지고, 모든 집안일이 저녁 10시 이전에 끝나야 했었다. 10시 이후까지 TV 시청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손, 발이 빨리 움직여졌다. 기도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시간이 차츰 기다려지고, 그 시간에서 누리는 하루의 모든 짐들이 놓임받는 생각과 느낌이 있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생활의 패턴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였다.
그렇게 끊으려고 하였던 스마트폰과의 전쟁이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그냥 덧없이 흘러보내던 시간들이 모아져서 하루가 알차게 지나가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니 재해석되어 지기도 하였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전과 다른 나의 일상이 매일 탄생하였다.
아침시간에는 절대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는 나의 습관과 신념이 무너져 자연스럽게 일찍 눈을 뜨게 되어 아침에도 기도 시간을 10분 정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까지 기존 교회에서 해왔던 기도와는 사뭇다른, 나와 주님의 관계에서 만남이 이어지고, 늘상 나의 요구와 질문만 있어왔던 기도, 그 가운데 내심 기복적인 것도 없지 않았고, 특히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게 하였던 기도였었다.
8주 동안의 침묵기도학교는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아직 주님의 현존과 가깝지 않다. 제목에는 찬란한 부재라고 적었지만, 그 부재에 적응이 쉽지 않다. 주님이 금방이라도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고, 내 손에 잡힐 듯한 현존이 느껴져야 했다. 나의 기도는 젖먹이 수준이다.
그러나, 그 부재가 느껴져서 더 깊은 그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현존은 나의 느낌하고 상관이 없을 듯 하다는 생각까지 미치었다. 그 분은 어디서나 언제나 현존이시다.
이제 인생의 통합을 이루어야 할 인생 여정에서 이토록 귀한 기도를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며, 이 기쁨의 충만함을 감사드린다.
나는 이제 이 기도의 자리에서 더 든든히 뿌리를 내리며 잎사귀를 싹틔우며, 열매를 맺어 가기를 기도한다.
우리를 감싸고 계신 주님의 은혜가 강 같이 흐른다.
( 온라인 침묵기도학교를 마치고 정 선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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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음성으로 하는 기도가 내 입에서 사라졌다. 그토록 통성기도, 방언기도, 큰 소리로 울부짖는 기도로 주님을 만났던 나였는데 어느새 내 입술은 소리없이 아니 그런 기도가 낯설고 5분을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냥 누워서도 하고, 뒹굴뒹굴 하면서도 ‘주님’을 불렀으니까.
그러나, 내 마음엔 기도가 아니었다. ‘이건 기도가 아니야’ 라며 내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한 듯하여 불안하고, 부끄럽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다가 만난 샬렘 침묵기도학교.
침묵과 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있기.
낯설기도 하고, 소위 요즘 뜨고 있는 명상같기도 하고, ‘이렇게 기도하는 게 맞어?’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었다. 예전에 들어보았던 관상기도는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하는 기도라고 생각하여 이상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주위의 가족들도 ‘우리 엄마가 수상하다(?)’며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지켜보았다.
1~2주는 내 몸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매우 힘이 들었다. 자꾸 벨소리를 기다리게 되고 눈이 감기고 분심과 잡념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기도 시간 만큼은 지키려고 애를 써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일과가 훨씬 더 단순해지고, 모든 집안일이 저녁 10시 이전에 끝나야 했었다. 10시 이후까지 TV 시청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손, 발이 빨리 움직여졌다. 기도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시간이 차츰 기다려지고, 그 시간에서 누리는 하루의 모든 짐들이 놓임받는 생각과 느낌이 있었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생활의 패턴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듯 하였다.
그렇게 끊으려고 하였던 스마트폰과의 전쟁이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그냥 덧없이 흘러보내던 시간들이 모아져서 하루가 알차게 지나가는 시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과 생각들을 정리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니 재해석되어 지기도 하였다.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전과 다른 나의 일상이 매일 탄생하였다.
아침시간에는 절대 일찍 일어나지 못한다는 나의 습관과 신념이 무너져 자연스럽게 일찍 눈을 뜨게 되어 아침에도 기도 시간을 10분 정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도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금까지 기존 교회에서 해왔던 기도와는 사뭇다른, 나와 주님의 관계에서 만남이 이어지고, 늘상 나의 요구와 질문만 있어왔던 기도, 그 가운데 내심 기복적인 것도 없지 않았고, 특히 교회에서 기도할 때는 사람들이 잘 들을 수 있게 하였던 기도였었다.
8주 동안의 침묵기도학교는 기도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아직 주님의 현존과 가깝지 않다. 제목에는 찬란한 부재라고 적었지만, 그 부재에 적응이 쉽지 않다. 주님이 금방이라도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고, 내 손에 잡힐 듯한 현존이 느껴져야 했다. 나의 기도는 젖먹이 수준이다.
그러나, 그 부재가 느껴져서 더 깊은 그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현존은 나의 느낌하고 상관이 없을 듯 하다는 생각까지 미치었다. 그 분은 어디서나 언제나 현존이시다.
이제 인생의 통합을 이루어야 할 인생 여정에서 이토록 귀한 기도를 알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며, 이 기쁨의 충만함을 감사드린다.
나는 이제 이 기도의 자리에서 더 든든히 뿌리를 내리며 잎사귀를 싹틔우며, 열매를 맺어 가기를 기도한다.
우리를 감싸고 계신 주님의 은혜가 강 같이 흐른다.
( 온라인 침묵기도학교를 마치고 정 선 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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