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부활, 우리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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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86회 작성일 24-04-05 23:52본문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1)
죽음이 기승을 부리는 삶이 있고, 생명이 왕성하게 작용하는 삶이 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의 두 양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롬 5:17)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 선동당한 군중들과 로마 군인들은 한통속이 되어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럼으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것을 도왔다. 제자들도 스승을 배반함으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것을 방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함하심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삶을 끝장내고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을 시작하셨다.
그러면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물음은 어떤 사람이 부활에 참여할까, 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0-2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첫째, 믿음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부활에 참여한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골 2:12)
이런 말도 한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롬 6:3-5, 8) 예수쟁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 때문에 죄와 옛사람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다운 사람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즉 부활의 원조이므로 부활은 “예수다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예수다운 사람이란, 자신의 예수다움을 자각한 사람이다. 겉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옛사람에 예속되지 않으며, 속사람을 자신의 진짜 정체성으로 각성한 사람이다. “겉사람은 낡아가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고후 4:16) 사람이다.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자아가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사람이며, 욕망에 기초한 자기중심적인 거짓자아가 죽은 사람이다. 마침내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이다. 죽기 전에 죽은 이런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또 예수다운 사람은 예수답게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속된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다. 욕망의 땅에서 신성을 꿈꾸고, 비교와 경쟁의 땅에서 인간 존중과 공존을 꿈꾸는 사람이다. 시기와 질투의 땅에서 연민과 사랑을 꿈꾸고, 증오와 저주의 땅에서 자비와 용서를 꿈꾸며, 거짓과 위선의 땅에서 진실과 정직을 꿈꾸는 사람이 예수다운 사람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
셋째, 부활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을 때, 백부장은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막 15:39)라고 고백했다. 죽어서는 안 될 분이 죽었다는 말이요, 무고無辜한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겠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부활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다. 전쟁으로 무고하게 죽은 어린이들, 다양한 폭력의 희생제물이 되는 여성들, 노인들, 약자들, 선교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원주민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기회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최악의 불행을 당한 사람처럼 보인다. 유가족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이가 부활한다는 말이 무슨 위로가 될까? 유가족이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세상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는 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이다. 가슴에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나 섭리 차원에서 보면 그들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죽음-시스템을 폭로하는 것이 그것이다. 불의한 정권의 무책임함과 허술함을 폭로하고, 합법의 얼굴을 한 야만을 고발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또 있다. 그것은 시대의 죄악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몸소 짊어진다는 사실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그 시대, 그 상황, 그 순간에 거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 대신 죽은 사람이다. 아니 나 대신 죽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희생양이다. 그들처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부활에 가장 먼저 참여한다. 그래야만 한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리얼하게 경험하는 사람에게 부활은 희망의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세월호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세례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무고하게 죽음으로써 “예수님처럼” 탐욕스런 정권의 불의를 폭로하고, 시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그들은 불의한 시대를 위한 속죄양이 되었다.
무고하게 죽은 이들은 지식인들처럼 강의를 통해서나 정치가들처럼 연설을 통해서, 종교인들처럼 설교를 통해서나 언론인들처럼 펜을 통해서 불의를 폭로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그들은 그냥 속수무책으로 죽음으로써 불의한 정권의 무능과 뻔뻔함을 드러냈고, 죽음-시스템의 무책임과 비겁함을 폭로했다. 생명보다 이윤에 혈안이 된 기득권층의 파렴치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고하게 죽으심으로써 로마 식민정권과 유대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죽음-시스템을 명징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예를 들어, 세월호 희생자들은 정권과 권력자들의 불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팬티 차림으로 달아남으로써 전 세계 선장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세월호 선장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가만히 있으라!” 방송해놓고 자기들만 황급히 탈출한 선원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항해할 수 없는 날씨에 출항을 명령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생명보다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었던 경영주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폐기해야 할 배의 사용 연한을 10년 더 늘려준 정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를 지휘했어야 하지만 일곱 시간 동안이나 미적대고 있었던 최고통수권자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죽어가는 것을 온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한 관련 기관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몰염치한 정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오늘 우리는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믿음과 세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기독교 신앙의 알짬을 묵상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짓자아에 대해 죽고 참자아로 다시 살아나 예수다움을 실현하는 일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예수다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다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자리여야 한다. 예수님처럼 순수와 신성을 꿈꾸며 번영신앙의 탐욕을 비우고, 연민과 사랑을 꿈꾸며 율법신앙의 독선을 중단하고, 자비와 용서를 꿈꾸며 우리 주변에 만연한 집단적 맹신의 광기를 잠재우는 날이어야 한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현존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한 일을 우리도 실천하기로 다짐하는 자리여야 한다. 시대의 불의에 눈 감거나 거기에 가담하기보다 그것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삶을 살기로, 이익과 권리에 집착하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대속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동시에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것을,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면서 그들에게 동료인간으로 현존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구현하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본질을 대신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한 대속의 사명이며, 시대가 부여한 역사적 소명이다. 그때 우리는 무고하게 죽은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그리스도들과 연대하고 한 몸 되어 인간의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교리와 율법, 이데올로기가 황폐하게 만든 삶의 대지에서 사랑과 평화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굴 것이다. 마침내 죽음이 왕노릇 하던 밤은 지나가고, 생명이 왕노릇 하는 새아침이 동틀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 3:10-11)
- 이민재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
(빌 3:11)
죽음이 기승을 부리는 삶이 있고, 생명이 왕성하게 작용하는 삶이 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의 두 양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롬 5:17)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제국의 총독 빌라도, 선동당한 군중들과 로마 군인들은 한통속이 되어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럼으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것을 도왔다. 제자들도 스승을 배반함으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것을 방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함하심로써 죽음이 왕노릇 하는 삶을 끝장내고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을 시작하셨다.
그러면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 물음은 어떤 사람이 부활에 참여할까, 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20-22)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첫째, 믿음과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부활에 참여한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골 2:12)
이런 말도 한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롬 6:3-5, 8) 예수쟁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기 때문에 죄와 옛사람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로 살아나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다운 사람
둘째,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즉 부활의 원조이므로 부활은 “예수다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예수다운 사람이란, 자신의 예수다움을 자각한 사람이다. 겉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옛사람에 예속되지 않으며, 속사람을 자신의 진짜 정체성으로 각성한 사람이다. “겉사람은 낡아가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고후 4:16) 사람이다. 페르소나라는 사회적 자아가 자신의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사람이며, 욕망에 기초한 자기중심적인 거짓자아가 죽은 사람이다. 마침내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사람이다. 죽기 전에 죽은 이런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또 예수다운 사람은 예수답게 “사는” 사람이다. 예수님처럼 속된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다. 욕망의 땅에서 신성을 꿈꾸고, 비교와 경쟁의 땅에서 인간 존중과 공존을 꿈꾸는 사람이다. 시기와 질투의 땅에서 연민과 사랑을 꿈꾸고, 증오와 저주의 땅에서 자비와 용서를 꿈꾸며, 거짓과 위선의 땅에서 진실과 정직을 꿈꾸는 사람이 예수다운 사람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
셋째, 부활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았을 때, 백부장은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막 15:39)라고 고백했다. 죽어서는 안 될 분이 죽었다는 말이요, 무고無辜한 사람이 죽었다는 뜻이겠다. 하나님은 그런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 부활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다. 전쟁으로 무고하게 죽은 어린이들, 다양한 폭력의 희생제물이 되는 여성들, 노인들, 약자들, 선교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수많은 원주민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삶의 기회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최악의 불행을 당한 사람처럼 보인다. 유가족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그들에게 사랑하는 이가 부활한다는 말이 무슨 위로가 될까? 유가족이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세상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사랑하는 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는 것이다. 가슴에 한 번만이라도 안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나 섭리 차원에서 보면 그들은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한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죽음-시스템을 폭로하는 것이 그것이다. 불의한 정권의 무책임함과 허술함을 폭로하고, 합법의 얼굴을 한 야만을 고발하는 것이 그것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 또 있다. 그것은 시대의 죄악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을 몸소 짊어진다는 사실이다.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그 시대, 그 상황, 그 순간에 거기에 있음으로써 다른 사람 대신 죽은 사람이다. 아니 나 대신 죽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은 희생양이다. 그들처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부활에 가장 먼저 참여한다. 그래야만 한다.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에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그렇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리얼하게 경험하는 사람에게 부활은 희망의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세월호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세례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무고하게 죽음으로써 “예수님처럼” 탐욕스런 정권의 불의를 폭로하고, 시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그들은 불의한 시대를 위한 속죄양이 되었다.
무고하게 죽은 이들은 지식인들처럼 강의를 통해서나 정치가들처럼 연설을 통해서, 종교인들처럼 설교를 통해서나 언론인들처럼 펜을 통해서 불의를 폭로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도 쉽지 않은 일일 테지만 그들은 그냥 속수무책으로 죽음으로써 불의한 정권의 무능과 뻔뻔함을 드러냈고, 죽음-시스템의 무책임과 비겁함을 폭로했다. 생명보다 이윤에 혈안이 된 기득권층의 파렴치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고하게 죽으심으로써 로마 식민정권과 유대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죽음-시스템을 명징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예를 들어, 세월호 희생자들은 정권과 권력자들의 불의를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팬티 차림으로 달아남으로써 전 세계 선장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세월호 선장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가만히 있으라!” 방송해놓고 자기들만 황급히 탈출한 선원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항해할 수 없는 날씨에 출항을 명령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생명보다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었던 경영주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폐기해야 할 배의 사용 연한을 10년 더 늘려준 정권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제일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구조를 지휘했어야 하지만 일곱 시간 동안이나 미적대고 있었던 최고통수권자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죽어가는 것을 온 국민이 바라보고 있는데도 한 사람도 구조하지 못한 관련 기관들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진실 규명을 가로막는 몰염치한 정부의 죄를 대신 짊어졌다.
오늘 우리는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믿음과 세례의 의미를 묵상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기독교 신앙의 알짬을 묵상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짓자아에 대해 죽고 참자아로 다시 살아나 예수다움을 실현하는 일에 정진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예수다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다운 삶을 살 것을 다짐하는 자리여야 한다. 예수님처럼 순수와 신성을 꿈꾸며 번영신앙의 탐욕을 비우고, 연민과 사랑을 꿈꾸며 율법신앙의 독선을 중단하고, 자비와 용서를 꿈꾸며 우리 주변에 만연한 집단적 맹신의 광기를 잠재우는 날이어야 한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부활의 현존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한 일을 우리도 실천하기로 다짐하는 자리여야 한다. 시대의 불의에 눈 감거나 거기에 가담하기보다 그것을 폭로하고 드러내는 삶을 살기로, 이익과 권리에 집착하지 않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대속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동시에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의 가족을 위로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을 것을,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면서 그들에게 동료인간으로 현존할 것을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부활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오늘은,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이 구현하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본질을 대신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우리에게 부탁한 대속의 사명이며, 시대가 부여한 역사적 소명이다. 그때 우리는 무고하게 죽은 인류 역사 속의 수많은 그리스도들과 연대하고 한 몸 되어 인간의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다. 교리와 율법, 이데올로기가 황폐하게 만든 삶의 대지에서 사랑과 평화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굴 것이다. 마침내 죽음이 왕노릇 하던 밤은 지나가고, 생명이 왕노릇 하는 새아침이 동틀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 3:10-11)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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