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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그날의 시선들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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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5회 작성일 24-04-05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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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고서 숨지셨다.
(막 15:37)
 
 
잠깐이어도 오래 기억되는 시간이 있고, 길어도 흔적 하나 남지 않는 시간이 있다.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의 시간은 수없이 흘러도 기억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날은 인류의 기억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자국을 남겼다. 그날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다양한 시선들을 동반한다. 그 시선들이 그날을 만들었고, 그날을 인류의 가슴에 새겼다.



 
예수를 보는 시선들
첫 번째 시선은 유대 지도자들(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 장로들, 율법학자들)의 시선이다. 이 사람들이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준”(15:1)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떨거지들이 못마땅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금식할 때 예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안식일을 범하는 무법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으며 장로들이 전해준 전통도 무시했다. 예수 무리가 종교전통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세간의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도 예수는 오히려 유대 지도자들을 비난했다. “너희는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도 저버리는구나.”(막 7:9) 적반하장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 무리를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막 8:11) 하지만 예수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위축은커녕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막 8:15)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감염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수에 대한 악감정이 거세게 타올랐다. 예수의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는 악감정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났다. 추수 때가 되어 포도원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농부들은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두 번째 보낸 종한테도 그렇게 하자, 세 번째에는 더 많은 종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때릴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다. 주인은 ‘내 아들은 존중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원 바깥에다가 내버렸다.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예수가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이다”라고 했을 때 눈치 빠른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겨냥하여 하신 말씀인 줄 알아차리고”(막 12:12) “‘어떻게 예수를 붙잡아 죽일까’하고 궁리하기 시작했다.”(막 14:1)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를 향한 시선은 증오로 가득한 폭력적인 시선이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예수를 향한 시선은 증오로 가득한 폭력적인 시선이었다.

두 번째 시선은 빌라도의 시선이다. 그는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었음을 알았다. 물론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마침 무리도 관례대로 해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해놓은 참이었다. 빌라도는 옳거니 하며 물었다. 여러분은 내가 그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바라는 거요?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빌라도가 되물었다. 그러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 사람을 어떻게 하라는 거요? 군중들은 소리 질렀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게 찜찜했는지 다시 물었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그러자 무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무리의 광기에 놀란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던 애초의 계획을 철회하고 “무리를 만족시켜주려고” 바라바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예수를 채찍질한 다음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 아, 빌라도, 그의 시선은 무책임하고 비겁했다.
아, 빌라도, 그의 시선은 무책임하고 비겁했다.




세 번째 시선은 군중의 시선이다. 빌라도의 판결을 굽게 한 군중의 시선은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광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어두워졌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무죄한 이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다.

네 번째 시선은 로마 병사들의 시선이다. 빌라도의 판결에 따라 그들은 예수를 총독 공관에 있는 뜰로 끌고 갔다. 그들은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머리에 씌운 후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희롱하였다.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는 시늉을 하였다. 그들의 시선은 조롱하는 시선이었다.

다섯 번째 시선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시선이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다가 마침 예수의 십자가 행렬을 보았다. 병사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예수를 만났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롬 16:13)고 하는데 루포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다. 억지로 진 십자가 덕에 아들과 아내도 예수쟁이가 되었다. 사도 바울이 “그 어머니는 내 어머니니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신심이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시몬의 대속에서 이미 시작됐다. 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의 예수를 향한 시선은 희생과 대속의 시선이다.

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의 예수를 향한 시선은 희생과 대속의 시선이다.

여섯 번째 시선은 행인들의 시선이다. 병사들은 예수를 골고다로 데려갔고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말한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그들의 시선은 모욕하는 시선이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모욕에 가세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일곱 번째 시선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 두 사람의 시선이다. 그들의 시선도 모욕적이긴 마찬가지다. 누가복음과는 달리 두 강도 모두 예수를 욕했다. 조롱과 모욕은 이날 골고다 언덕에 깔린 배음背音 같은 것이었다.

여덟 번째 시선은 여자들의 시선이다. 낮 열두 시가 되자 예수는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이 모습을 막달라 출신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같은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자들도 있었고,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있었다. 멀찍이서 예수를 지켜보는 그들의 시선엔 연민과 애정이 가득했다.

멀찍이서 예수를 지켜보는 여자들의 시선엔 연민과 애정이 가득했다.





아홉 번째 시선은 백부장의 시선이다. 그는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제자들이 욕망의 눈으로 본 예수를 한 이방인이 신성한 눈으로 본다. 그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본 유일한 시선이었다.

열 번째 시선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시선이다. 그는 명망 있는 의회의원이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인류의 기억에 잊지 못할 자국을 남긴 그날도 저문녘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했다. 빌라도가 시신을 내주자 요셉은 “삼베를 사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비참하게 죽은 예수에게 그는 최고의 예의와 경의를 바쳤다.

빌라도가 시신을 내주자 요셉은 “삼베를 사가지고 와서 예수의 시신을 그 삼베로 싸서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모셨다.” 비참하게 죽은 예수에게 그는 최고의 예의와 경의를 바쳤다.


 


예수다움을 보는 시선들
예수 한 사람을 보는 시선이 이렇게 여럿이다. 누구는 증오의 시선으로(유대 지도자들), 누구는 조롱의 시선으로(병사, 행인, 지도자 등), 누구는 무책임하고 비겁한 시선으로(빌라도) 예수를 본다. 광기 어린 군중의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시선만 있는 건 아니다. 희생과 대속의 시선도 있고(구레네 시몬),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여자들)도 있다. 그뿐이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처참한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시선(백부장)도 있고, 그에게 최고의 예의와 경의를 바치는 시선(아리마대 요셉)도 있다.

당신이 그날 거기에 있었다면 어떤 시선으로 예수를 바라보았을까? 부정적인 시선이었을까, 긍정적인 시선이었을까? 그걸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건 “내면화”의 방법이다. 이천 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내 안에 있는 “예수다움”(참자아)으로 치환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다움이라는 당신의 참자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날의 시선을 결정한다.

예수다움이라는 당신의 참자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날의 시선을 결정한다.

만일 당신이 내면의 예수다움을 망각하고 자기비하나 자기혐오, 심지어 자기학대를 일삼는다면, 그날, 유대지도자들처럼 증오의 시선으로 예수를 봤을 공산이 크다. 당신이 전통과 교리의 잣대로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한다면, 그날, 예수를 폭력적으로 대했을 여지가 많다. 만일 당신이 타인의 만족을 위해 삶의 진실을 외면한다든가 책임질 일을 책임지지 않고 합리화를 늘어놓는다면, 그날, 빌라도처럼 무책임하고 비겁한 시선으로 예수를 대했을 확률이 높다. 하여, 자신의 실존적・역사적・교회적 책무를 회피하고 비겁한 생을 비루하게 살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속의 풍조에 휩쓸리거나 이해관계에 집착하여 당신 내면의 예수다움을 외면한다면, 그날, 군중들과 함께 광기에 사로잡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당신이 예수답게 살면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고 자조自嘲한다면, 그날, 군인들이나 행인들과 대제사장들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틀림없이 조롱했을 것이다. 하여, 참자아라는 진정한 정체성에 무지한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사람을 조롱하고 비꼬는 왜곡된 인격의 소유자가 됐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내면의 예수다움이 깨어나고 활성화되면, 구레네 시몬처럼 내 십자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도 지는 희생과 대속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참자아에 온전히 뿌리내리면, 여인들처럼 지극한 연민과 애정을 갖고 예수다움을 길러내는 일에 온 정성 기울일 것이다. 백부장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는다면, 예수다움을 실현하는 일을 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매진할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다움에 예의와 경의를 표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한결 고결하고 품위 있을 것이며, 당신의 삶은 한층 아름답고 경이로울 것이다. 당연히, 그날, 거기에서 당신은 예수의 가장 친한 벗으로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예수다움에 예의와 경의를 표할 수 있다면, 당신은 한결 고결하고 품위 있을 것이며, 당신의 삶은 한층 아름답고 경이로울 것이다. 당연히, 그날, 거기에서 당신은 예수의 가장 친한 벗으로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그날 열 개의 시선 속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는 오늘 당신에게 묻는다. 내면의 예수다움을 사랑하느냐고. 예수다움에 애정을 품고 있느냐고.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징표임을 아느냐고. 하여, 그것에 최고의 예의와 경의를 표할 용의가 있느냐고. 이 물음에 당신은 정직하게 대답해야 한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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