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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꽃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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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38회 작성일 24-02-13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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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히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얓게 빛났다.
(막 9:3)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습이 변했다.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 주현절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야기를 묵상하며 “변모”變貌를 갈망한다.

사실 생명 세계에는 변모 현상이 가득하다. 알이 애벌레로 자라고 애벌레가 성충이 되는 과정도 변모 과정이고, 씨앗이 싹트고 자라 나무가 되는 과정도 변모 과정이며, 달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었다가 어미 닭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변모 과정이다. 변모가 없으면 생명 세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장수풍뎅이
작년 여름, 8월 어느 날이었다. 새벽 1시쯤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소리가 계속 났다. 약간 섬찟하기도 했다. 그 시각에 그런 소리가 날 리 없기 때문이다. 베란다 벽을 타고 누가 침입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건 아니었다. 소리가 나는 위치가 바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귀를 기울였더니 방에 딸린 베란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신경이 온통 소리에 쏠려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베란다에 있는 책꽂이 위에 놓여있던 장수풍뎅이 애벌레 기르는 통에서 뭔가 시커먼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성충이 된 장수풍뎅이가 통에서 나오려고 버둥대고 있었고 그것이 사육통과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손녀 여율이가 기르던 장수풍뎅이 애벌레가 성충으로 변모한 것이다. 다음 날 통의 흙을 쏟아보았더니 성충이 된 장수풍뎅이 두 마리가 기어 나왔다. 신기했다.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라면 신앙도 변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실 “변모”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모티브다. 바울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변모로의 초대이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변모의 과정을 “형상image에서 모양likeness으로의 여정”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는 구절을 그렇게 해석했다. “형상”이 모든 인간 안에 있는 신적 잠재성을 의미한다면, 모양은 그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형상에서 모양으로의 여정을 완벽하게 완성하신 분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더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 보라”(히 12:2)고 한 것이다. 우리도 변모의 과정을 시작하고 완성하라는 뜻에서 말이다.





줄무늬 애벌레
그러면 어떻게 변모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말이 생각났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고후 3:18) 사도 바울은 “너울을 벗어버려야”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더욱 큰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묘사한다. 너울은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덮개다. 다시 말해 참자아를 덮고 있는 거짓자아요, 신성을 가두고 있는 에고다. 그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이러한 변모의 과정을 묵상하는데 오래전에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가 생각났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이 이야기는 장차 호랑나비가 될 줄무늬 애벌레가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1. 줄무늬 애벌레는 배가 고파 나뭇잎을 갉아 먹었다. 몸집은 커졌지만 따분했다. 삶에는 몸집을 불리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을 것 같았다. 줄무늬 애벌레는 나무에서 기어 내려왔다. 땅에 내려와서 보니 수많은 애벌레가 하늘 높이 솟은 커다란 기둥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그 기둥은 꼭대기에 오르고 싶어 하는 애벌레들이 서로 뒤엉켜 만들어진 기둥이었다.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다. 줄무늬 애벌레는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줄무늬 애벌레는 애벌레들 속으로 밀고 들어갔다.
 



#2.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다. 얼마큼 올라갔을 때 비명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자기가 노랑 애벌레를 밟고 있었다. 미안했지만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도 밟고 올라갔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외길에 접어들었는데 노랑 애벌레가 그 길을 막고 있었다.
  줄무늬 애벌레가 노랑 애벌레를 밟고 올라가려고 하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노랑 애벌레의 눈길은 다정했지만 슬퍼 보였다. 줄무늬 애벌레는 혼란스러웠다. 동료를 짓밟고 올라가는 게 옳지 않은 것 같았다. 회의가 들자 위로만 오르는 삶이 갑자기 싫어졌다.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함께 있고 싶었다. 노랑 애벌레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노랑 애벌레가 말했다. 친구 애벌레들을 짓밟으며 꼭대기로 올라가는 짓을 그만두자고.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함께 애벌레 기둥에서 내려왔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둥글게 뭉쳐 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애벌레들에게 짓밟혔지만 행복했다.



 
#3. 얼마 동안 천국에서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랑도 시들해졌다. 꼭대기에 대한 미련이 되살아났다.
  어느 날 쿵 소리가 나서 가보니 애벌레 세 마리가 기둥에서 떨어져 있었다. 두 마리는 이미 죽었고, 한 마리가 죽어가면서 말했다. “저 꼭대기는 나비들만 보게 될 거야.”
  나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비가 뭐지?’ 줄무늬 애벌레는 꼭대기가 더 궁금해졌다. 줄무늬 애벌레는 가지 말라는 노랑 애벌레를 뿌리치고 혼자 애벌레 기둥을 다시 기어 올라갔다.



 
#4. 노랑 애벌레는 쓸쓸했다. 줄무늬 애벌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늙은 애벌레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큰일이 난 줄 알고 노랑 애벌레가 도와주려고 했지만 늙은 애벌레는 안 그래도 된다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나비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만 해.”
  깜짝 놀란 노랑 애벌레가 물었다. “나비요? 나비가 뭐죠?”
  “그건 네가 되어야 할 바로 그것이란다. 그것은 아름다운 두 날개로 날아다니며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지. 나비는 꽃에 있는 달콤한 이슬을 마시며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운반해 준단다. 나비가 없으면 이 세상에는 꽃이 사라지고 말거야.”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지요?” 노랑 애벌레가 물었다.
  “애벌레 상태를 포기할 만큼 날기를 갈망할 때 가능한 일이란다.”
  “죽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겉모습’은 죽은 듯이 보여도, ‘참모습’은 여전히 살아 있단다. 모습은 바뀌지만,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노랑 애벌레가 주저하며 물었다. “나비가 되겠다고 결심하면 뭘 해야 하지요?”
  “나를 잘 봐. 나는 지금 고치를 만들고 있어. 그 속에서 나비가 만들어지는 거란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어. 네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될 때 너는 ‘참된 사랑’을 할 수가 있어. 꽃들의 생명을 탄생하게 하는 그런 사랑을!”
  늙은 애벌레는 비단실로 계속 자신을 감았다. 마지막 실을 뽑으면서 소리쳤다.

  “너는 한 마리 아름다운 나비가 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노랑 애벌레는 나비가 되는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늙은 애벌레 옆에 매달려서 자신의 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5. 줄무늬 애벌레는 이번에는 훨씬 빨리 올라갔다.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동료들을 밟으며 올라가고 또 올라갔다. 마침내 꼭대기에서 빛이 스며드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때 꼭대기에서 몇몇 애벌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줄무늬 애벌레는 등골이 오싹했다. 꼭대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무것도 없다니! 속삭이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기 봐, 또 다른 기둥이 있네! 저기에도 또 있고, 사방에 다 있어!”
  줄무늬 애벌레는 실망과 더불어 분노를 느꼈다. 그는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6. 노랑 애벌레가 생각났다. 그녀의 말이 옳았어. 그때 함성과 함께 애벌레들이 술렁거렸다. 찬란한 노란 날개가 달린 한 생명체가 기둥 주위를 날고 있었다. 황홀했다. 줄무늬 애벌레가 머리를 내밀자 날개 달린 그 생명체는 그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때 기둥에서 떨어져 죽어가던 애벌레가 한 말이 생각났다. “저 꼭대기는 나비들만 보게 될 거야!” 줄무늬 애벌레는 생각했다. ‘이게 나비라는 것인가?’ 그런데 노랑나비의 눈동자는 노랑 애벌레의 눈동자와 많이 닮아 있었다.
  마침내 줄무늬 애벌레는 깨달았다. 꼭대기에 오르려면 동료들을 짓밟고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야 함을! 노랑나비가 노랑 애벌레였다면 자기 안에도 나비가 들어 있음을!
  줄무늬 애벌레는 밑으로 내려왔다.
 



#7.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와 뒹굴며 놀던 풀밭으로 기어갔다. 기진맥진한 그는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 기척을 느껴 잠에서 깼는데, 아, 그 노란 생명체가 눈부신 날개로 부채질을 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줄무늬 애벌레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나비로 변모한 노랑 애벌레가 틀림없었다. 줄무늬 애벌레도 나비가 되고 싶었다. 노랑나비는 줄무늬 애벌레에게 날갯짓했다. 노랑나비는 줄무늬 애벌레를 나뭇가지로 이끌었다. 그 가지에는 찢어진 고치가 두 개 달려 있었다.
  그 노란 생명체는 머리와 꼬리를 고치에 들이미는 시늉을 여러 번 했다. 줄무늬 애벌레는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줄무늬 애벌레는 나뭇가지로 기어 올라갔다. 거꾸로 매달려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점점 어둡고 캄캄해졌다.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노랑나비가 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꽃들에게 희망을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한 마리 나비가 되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러려면 거쳐야 하는 과정들이 있다.
 
  첫째, 삶에는 높아지는 것 이상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남을 밟고서라도 꼭대기에 기어오르는 에고 중심의 생활방식을 포기해야 한다.
  셋째, 자기 안에 나비─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든 하나님의 씨앗이라 하든 그리스도성이라 하든 참자아라 하든─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넷째, 애벌레 상태를 포기할 만큼 나비가 되려는 갈망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다른 사람들을 나비로 만드는 소명을 받들어야 한다.
 
또 중요한 과정이 있다. 예수님이 산에서 변모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한다. 모세와 엘리야는 변모 과정을 거친 “나비”(NABI, 예언자)였다. 예수님이 다볼산에서 변모했다면 이 두 사람은 모두 호렙산에서 변모했다. 모세는 여리고 부드러운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리고 출애굽 여정에서 사십일 동안 산에 머물면서 변모했고, 엘리야는 갈멜을 떠나 광야 사십 일을 걸어 호렙에 이르렀을 때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변모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나비였고, 광야 사십 년을 이끈 나비였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이르게 한 나비였다. 엘리야는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며 역사 변혁의 소병을 받든 나비였고, 여러 해 가뭄을 해결하여 죽어가던 생명을 살린 나비였다.

이제 우리 차례다. 우리는 동시대인들이라는 꽃들에게 생명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시대의 나비로 변모해야 하며, 우리에게 시대가 부여한 나비(예언자)의 소명을 받들어야 한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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