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긍정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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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19회 작성일 24-02-07 13:58본문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렘 29:11)
상처를 입은 적도, 해를 입은 적도, 분노한 적도, 두러워한 적도, 불완전한 적도 없는 ‘고요하고 광활한 열려있음’만이 있을 것이네.
(『침묵수업』)
지난 수요일, 새벽에 깨자마자 유튜브에서 〈윤슬의거룩한독서〉를 클릭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루틴이다. 시편과 제1 독서, 제2 독서 세 개의 본문이 차례로 흘러나왔다. 캄캄한 방에 가득한 침묵 속에서 말씀을 듣는 마음이 경건하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시 35:10) 시편을 듣는 동안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를 하던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들이야말로 거부권을 남발하는 무책임한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약탈당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마음이 비통했다.
제1 독서는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였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렘 29:4)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이었다. 하지만 포로 기간이 70년 동안 계속될 것이니 고국으로 곧 귀환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제2 독서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며, 현대인들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마음에는 귀신처럼 이상행동을 하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의지의 덩어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서일과 본문을 듣고 난 뒤에 묵상하려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또 하나의 유튜브가 저절로 실행됐다. 내용은 성공과 행복의 비결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둘째,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셋째, 꿈을 품어라. 넷째, 성취를 믿어라. 다섯째, 말을 다스려라. 여섯째, 습관을 길들여라. 일곱째,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날 내가 들은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첫 번째 법칙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생산적인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형편이 좋을 때뿐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에 긍정의 결이 나야 한다. 결은 일정한 흐름의 패턴으로 생각에도 결이 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부정적인 결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긍정적인 결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고를 관장하는 좌뇌에 긍정의 결이 날 때까지 긍정적 생각을 반복해야 한다.
생각의 결이 긍정적이면 감정도 조절된다. 감정은 생각과 무관한 독립변수가 아니라, 생각에 예속된 종속변수다. 어떤 사건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먼저 그 사건을 화낼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을 고치면 감정도 소멸한다. 화나는 감정은 화나는 판단(생각)에 뒤따라 일어난다. 감사의 감정은 감사한 생각에 뒤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이성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그러므로 꿈으로 기대하라, 자신에게! 그러면 웃게 될 것이다. 사랑으로 기대하라, 배우자에게! 행복하게 될 것이다. 격려로 기대하라, 자녀에게! 흐뭇하게 될 것이다. 응원으로 기대하라, 동료에게! 감동하게 될 것이다. 긍정적으로 기대하라.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다. 흙탕물을 바라보며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희망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행복과 성공은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에 달려 있다.
흙탕물을 바라보며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희망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행복과 성공은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에 달려 있다.
위기에서
다른 때 같으면 흔하고 진부한 성공학의 한 대목쯤으로 여기며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편지를 묵상하고 나서였는지 그날따라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사로잡혀간 포로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첫째,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섣불리 생존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겠다. 둘째,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대대로 가족을 이뤄 번성하라는 말이었다. 셋째, “사로잡혀 간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안하게 살려면 사로잡아간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예레미야는 긍정적인 “생각”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어려운 일을 주문한 것이다. 평시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데 포로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예례미야가 생존이나 생계 때문에 긍정적인 삶을 권고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바빌로니아에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삶을 보장받았다. 그들에게는 생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 포로상황은 야훼 하나님 신앙을 회의하게 했다. 바빌로니아의 신이 야훼보다 더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였다. 포로상황에서 선민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유대 포로들이 존중받았어도 그들은 포로일 뿐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희망의 위기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줬다.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로니아뿐 아니라 본국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언자가 하나냐였다. 그는 제사장들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선언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이 년 안에 이곳으로 다시 가져오겠다.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렘 28:3-4)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두 번째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였다....세 번째 문제는 희망의 위기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줬다.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로니아에도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속지 말라면서 포로 기간이 “칠십 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렘 29:8-9)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 곧 유대인들이 신앙의 위기와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희망의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살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의 결
이런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성공의 첫째 법칙이 그날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특히 생각의 “결”에 대한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만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부정적인 결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긍정적인 결이 생긴다, 그러니 사고를 관장하는 좌뇌에 긍정의 결이 날 때까지 반복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나무 무늬가 생각났다. 나무 무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무의 속살에 새겨진 결이다. 한번 생기면 결은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의 결이 좌뇌에 새겨지든, 심비心碑에 새겨지든 일단 새겨지고 나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긍정의 결이 내면에 새겨지도록 끊임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해야 한다.
옳은 애기다. 하지만 아쉬웠다. 어떻게 해야 긍정의 결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성공학이나 자기계발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관상기도를 말해야 하는 지점이다. 내면에 긍정의 결을 새기는데 관상기도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향심기도 수행은 마음에 긍정의 결을 새기는 탁월한 수행이다.
긍정 수행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기도다. 하지만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상태는 지속되지 않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의 방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한다. 생각들과 싸우지 않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곧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순간 생각들로 어지럽혀진 마음은 다시 처음의 상태 곧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하는 상태를 회복한다.
향심기도의 스승들은 기도 중에 떠오르는 생각의 “내용에”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기도 중에 아무리 폭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도, 아무리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도,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쫓아버리려고 애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럴수록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 비난이 계속되는 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을 교정하려는 씨름이 아니다. 생각을 다루는 기술art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도 중에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도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기도하는 순간의 일시적인 상태일 뿐, 수행자의 전부도 본성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비난과 혐오에 휩싸인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비난과 자기혐오는 타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이어진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자기든 남이든 존재에 대한 부정은 삶 자체를 부정하게 하고 운명을 저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을 교정하려는 씨름이 아니다. 생각을 다루는 기술art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도 중에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도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기도하는 순간의 일시적인 상태일 뿐, 수행자의 전부도 본성도 아니다.
향심기도 수행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뿐이다. 생각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계속 그렇게 수행하다 보면 생각에서 점점 초연해지고,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존재의 차원이 드러난다. 그걸 『침묵수업』의 저자 마틴 레어드는 이렇게 표현한다. “상처를 입은 적도, 해를 입은 적도, 분노한 적도, 두러워한 적도, 불완전한 적도 없는 ‘고요하고 광활한 열려있음’만 그저 있을 걸세. 그게 바로 자네이네!” 이게 바로 참자아다!
이렇게 하여 향심기도 수행자는 자기를 새롭게 긍정한다. 자기긍정은 향심기도가 주는 은혜중의 은혜다. 이때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이미 긍정임을 깨닫는다. 마침내 우리의 전존재에 하나님의 약속이 울려퍼진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 29:11)
긍정 수행을 통해 존재 자체가 긍정임을 자각하면 우리는 예레미야가 권고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미소지으며 용서할 수 있다. 운명을 비통하게 하고,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팔자를 꼬이게 한 하나님을!
긍정 수행을 통해 존재 자체가 긍정임을 자각하면 우리는 예레미야가 권고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미소지으며 용서할 수 있다. 운명을 비통하게 하고,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팔자를 꼬이게 한 하나님을!
(렘 29:11)
상처를 입은 적도, 해를 입은 적도, 분노한 적도, 두러워한 적도, 불완전한 적도 없는 ‘고요하고 광활한 열려있음’만이 있을 것이네.
(『침묵수업』)
지난 수요일, 새벽에 깨자마자 유튜브에서 〈윤슬의거룩한독서〉를 클릭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나만의 루틴이다. 시편과 제1 독서, 제2 독서 세 개의 본문이 차례로 흘러나왔다. 캄캄한 방에 가득한 침묵 속에서 말씀을 듣는 마음이 경건하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시 35:10) 시편을 듣는 동안 〈이태원참사특별법〉 제정을 위해 오체투지를 하던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그들이야말로 거부권을 남발하는 무책임한 정권에 의해 억압받고 약탈당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마음이 비통했다.
제1 독서는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포로들에게 보내는 예레미야의 편지였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렘 29:4)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려의 말이었다. 하지만 포로 기간이 70년 동안 계속될 것이니 고국으로 곧 귀환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제2 독서는 군대 귀신 들린 사람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며, 현대인들의 이야기였다. 우리의 마음에는 귀신처럼 이상행동을 하게 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의지의 덩어리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성서일과 본문을 듣고 난 뒤에 묵상하려는데 유튜브 알고리즘에 따라 또 하나의 유튜브가 저절로 실행됐다. 내용은 성공과 행복의 비결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둘째, 지혜의 씨앗을 뿌려라. 셋째, 꿈을 품어라. 넷째, 성취를 믿어라. 다섯째, 말을 다스려라. 여섯째, 습관을 길들여라. 일곱째,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날 내가 들은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첫 번째 법칙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파괴력을 발휘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은 생산적인 힘을 발휘한다. 따라서 형편이 좋을 때뿐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에 긍정의 결이 나야 한다. 결은 일정한 흐름의 패턴으로 생각에도 결이 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부정적인 결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긍정적인 결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고를 관장하는 좌뇌에 긍정의 결이 날 때까지 긍정적 생각을 반복해야 한다.
생각의 결이 긍정적이면 감정도 조절된다. 감정은 생각과 무관한 독립변수가 아니라, 생각에 예속된 종속변수다. 어떤 사건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먼저 그 사건을 화낼 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을 고치면 감정도 소멸한다. 화나는 감정은 화나는 판단(생각)에 뒤따라 일어난다. 감사의 감정은 감사한 생각에 뒤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이성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그러므로 꿈으로 기대하라, 자신에게! 그러면 웃게 될 것이다. 사랑으로 기대하라, 배우자에게! 행복하게 될 것이다. 격려로 기대하라, 자녀에게! 흐뭇하게 될 것이다. 응원으로 기대하라, 동료에게! 감동하게 될 것이다. 긍정적으로 기대하라.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이것은 과학이다. 흙탕물을 바라보며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희망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행복과 성공은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에 달려 있다.
흙탕물을 바라보며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별을 바라보며 희망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행복과 성공은 진흙 속에 숨겨진 진주를 찾아내는 안목에 달려 있다.
위기에서
다른 때 같으면 흔하고 진부한 성공학의 한 대목쯤으로 여기며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편지를 묵상하고 나서였는지 그날따라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예레미야는 바빌로니아에 사로잡혀간 포로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첫째,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섣불리 생존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이겠다. 둘째,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대대로 가족을 이뤄 번성하라는 말이었다. 셋째, “사로잡혀 간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안하게 살려면 사로잡아간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예레미야는 긍정적인 “생각”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어려운 일을 주문한 것이다. 평시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데 포로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더욱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예례미야가 생존이나 생계 때문에 긍정적인 삶을 권고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바빌로니아에서 유대인들은 비교적 안정된 삶을 보장받았다. 그들에게는 생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 포로상황은 야훼 하나님 신앙을 회의하게 했다. 바빌로니아의 신이 야훼보다 더 강해보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였다. 포로상황에서 선민의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바빌로니아에서 유대 포로들이 존중받았어도 그들은 포로일 뿐이었다.
세 번째 문제는 희망의 위기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줬다.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로니아뿐 아니라 본국에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예언자가 하나냐였다. 그는 제사장들과 백성이 보는 앞에서 예레미야에게 선언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이곳에서 탈취하여 바빌로니아로 가져간 성전의 모든 기구를 내가 이 년 안에 이곳으로 다시 가져오겠다.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유다의 모든 포로도 내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겠다.”(렘 28:3-4)
가장 큰 문제는 신앙의 위기였다....두 번째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였다....세 번째 문제는 희망의 위기였다. 거짓 예언자들은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포로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줬다.
헛된 희망을 품게 하는 거짓 예언자들은 바빌로니아에도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속지 말라면서 포로 기간이 “칠십 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너희는 지금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 속지 말고, 점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렘 29:8-9)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 곧 유대인들이 신앙의 위기와 정체성의 위기, 그리고 희망의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긍정적으로 살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의 결
이런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성공의 첫째 법칙이 그날 귀에 들어왔던 것이다. 특히 생각의 “결”에 대한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만했다. 부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부정적인 결이 생기고,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면 긍정적인 결이 생긴다, 그러니 사고를 관장하는 좌뇌에 긍정의 결이 날 때까지 반복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나무 무늬가 생각났다. 나무 무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나무의 속살에 새겨진 결이다. 한번 생기면 결은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긍정적인 생각의 결이 좌뇌에 새겨지든, 심비心碑에 새겨지든 일단 새겨지고 나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긍정의 결이 내면에 새겨지도록 끊임없이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해야 한다.
옳은 애기다. 하지만 아쉬웠다. 어떻게 해야 긍정의 결을 마음에 새길 수 있는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성공학이나 자기계발서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관상기도를 말해야 하는 지점이다. 내면에 긍정의 결을 새기는데 관상기도만큼 좋은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특히 향심기도 수행은 마음에 긍정의 결을 새기는 탁월한 수행이다.
긍정 수행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기도다. 하지만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하는 상태는 지속되지 않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들의 방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의외로 간단한다. 생각들과 싸우지 않고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단어는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한다는 지향의 상징(곧 마음의 표시)이기 때문에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순간 생각들로 어지럽혀진 마음은 다시 처음의 상태 곧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하는 상태를 회복한다.
향심기도의 스승들은 기도 중에 떠오르는 생각의 “내용에”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듭 강조한다. 기도 중에 아무리 폭력적인 생각에 사로잡혀도, 아무리 음란한 생각에 사로잡혀도,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쫓아버리려고 애쓰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럴수록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 비난이 계속되는 한 부정적인 에너지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을 교정하려는 씨름이 아니다. 생각을 다루는 기술art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도 중에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도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기도하는 순간의 일시적인 상태일 뿐, 수행자의 전부도 본성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기 비난과 혐오에 휩싸인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자기비난과 자기혐오는 타인에 대한 비난과 혐오로 이어진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자기든 남이든 존재에 대한 부정은 삶 자체를 부정하게 하고 운명을 저주하게 하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생각의 내용을 교정하려는 씨름이 아니다. 생각을 다루는 기술art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도 중에 나쁜 생각에 사로잡혀도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은 기도하는 순간의 일시적인 상태일 뿐, 수행자의 전부도 본성도 아니다.
향심기도 수행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동의할 뿐이다. 생각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계속 그렇게 수행하다 보면 생각에서 점점 초연해지고,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존재의 차원이 드러난다. 그걸 『침묵수업』의 저자 마틴 레어드는 이렇게 표현한다. “상처를 입은 적도, 해를 입은 적도, 분노한 적도, 두러워한 적도, 불완전한 적도 없는 ‘고요하고 광활한 열려있음’만 그저 있을 걸세. 그게 바로 자네이네!” 이게 바로 참자아다!
이렇게 하여 향심기도 수행자는 자기를 새롭게 긍정한다. 자기긍정은 향심기도가 주는 은혜중의 은혜다. 이때 우리는 존재 자체가 이미 긍정임을 깨닫는다. 마침내 우리의 전존재에 하나님의 약속이 울려퍼진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 29:11)
긍정 수행을 통해 존재 자체가 긍정임을 자각하면 우리는 예레미야가 권고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미소지으며 용서할 수 있다. 운명을 비통하게 하고,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팔자를 꼬이게 한 하나님을!
긍정 수행을 통해 존재 자체가 긍정임을 자각하면 우리는 예레미야가 권고한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미소지으며 용서할 수 있다. 운명을 비통하게 하고,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팔자를 꼬이게 한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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