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영성에세이) 삶의 순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04회 작성일 24-01-18 20:34

본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창 1:1, 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마 6:3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성경이 통찰한 아름다운 삶의 진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아름다운 삶의 진실을 객관적인 대상 세계에 한정하는 실수를 범한다. 오해하지 말자. 창조 이야기는 우주발생학cosmogenesis이 아니다. 삶의 진실에 관한 장대한 서사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읽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삶을 창조하셨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하시는, 창조하실 삶에 대한 이야기다.
“태초에 하나님이 삶을 창조하셨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하시는, 창조하실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삶의 창조
창조 이전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 이것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삶이야말로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뒤범벅된 불행의 덩어리 아닌가. 그 불행의 덩어리를 성경은 “물”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성경에서 물은 “혼돈”을 상징한다. (물론 생명을 상징할 때도 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가 가로막았을 때 홍해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혼돈 그 자체였다. 설상가상으로 바로의 군대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두려워하면서 모세에게 원망을 퍼부었다. “이집트에는 묘자리가 없어서 우리을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출 14: 11) 홍해를 건너기도 전에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휩싸였다.

우리가 그렇다. 견디기 힘든 문제가 엄습할 때 삶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뒤범벅된 바닥없는 수렁 같이 느껴진다. 삶은 모든 의미를 삼켜버리는 “무정형의 물덩어리”(폰 라트) 같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물덩어리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다.

우선 하나님의 영이 물덩어리 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삶의 진실이다. 삶이 새롭게 창조되려면 먼저 하나님의 영이 움직여야 한다. 공부든, 취업이든, 결혼이든, 사업이든, 사랑이든 그 위에서 하나님의 영이 움직여야 한다. 그게 “삶의 순서”다. 그러면 홍해에 길을 내신 하나님이 삶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 속에 길을 내신다. 이때 상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빛이 삶의 구석구석에 스미고, 내면 깊은 곳에 침투한다. 영혼은 신성한 빛으로 환하게 빛난다.

“하나님은 빛이시며”(요일 1:5)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신다.”(딤전 6:16)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다. 그렇기에 우리 안에는 이미 신성한 빛으로 충만하다. 예수님이 무지렁이들에게 괜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신 게 아니며, 사도 바울이 우리더러 괜히 “빛의 자녀”라고 한 게 아니다. 자신이 이미 빛임을 깨달으라고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삶을 새롭게 창조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빛임을 자각해야 하고, 내면의 빛을 경험해야 한다. 그게 “삶의 순서”다.
삶을 새롭게 창조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이 빛임을 자각해야 하고, 내면의 빛을 경험해야 한다. 그게 “삶의 순서”다.



 
빛 체험
20세기의 유명한 신비가인 요가난다는 자신의 빛 체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갑자기 스승이 나의 가슴을 살짝 건드리셨다. 그 순간 큰 자력에 끌리듯이 숨이 허파에서 빠져나갔다. 육체는 죽은 사람 같았지만, 의식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의식은 몸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로 확장됐다. 만물이 내 시야에서 파동쳤고, 내 몸과 스승의 몸, 둥근 기둥이 늘어선 뜰과 마루와 수목, 태양 등이 갑자기 무섭게 요동치며 빛의 바다 같은 곳으로 녹아들었다.

내 안에서 하나의 빛이 부풀어 오르더니 도시와 대륙과 지구, 태양계와 은하계와 성운과 유동하는 소우주 등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빛을 발하는 대우주가 마치 밤에 멀리 보이는 도시처럼 무한해진 내 존재의 내면에 펼쳐졌다. 도저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했다. 내 존재의 중심핵에서 나오는 빛나는 광채는 우주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갔다. 나는 우주의식을 체험하고 있었고, 그것은 빛의 충만이었다. 나는 원래 은총 그 자체였다. 나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숨이 폐로 돌아왔다. 무한하고 광대한 빛의 세계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빛의 희열로 가득한 우주의식도 사라졌다. 다시 치욕스러운 육체의 동굴에 갇혔다고 생각하니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스승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조용히 말씀하셨다. ‘황홀 상태에 너무 도취해서는 안 된다. 아직 세상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자 우리 마당을 쓸고 나서 강변이나 함께 걷자.’ 스승은 내게 균형 잡힌 생활의 비밀을 가르치셨다. 영혼은 우주의 심연을 넘나들어도, 몸은 일상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참자아를 자각한 사람들은 이처럼 이중적 존재 양식을 실천한다. 내면의 지복을 향유하면서도 세속에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수행한다.”

우리도 이러한 “이중적 존재 양식”을 구사해야 한다. 내면의 지복을 향유하면서도 “마당을 쓸고 강변을 걸어야” 한다. 참자아를 각성한 상태에서 일상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영성현실의 행복을 맛보면서 생활현실의 일들을 감당해야 한다. 이게 “삶의 순서”다. 이 순서를 따르지 않을 때 삶은 고해요 지옥이다.

이러한 “이중적 존재 양식”을 구사해야 한다. 내면의 지복을 향유하면서도 “마당을 쓸고 강변을 걸어야” 한다. 참자아를 각성한 상태에서 일상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 이게 삶의 순서다.

하지만 먼저 영성현실에 머무르면 사정은 달라진다. 영성현실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고 있으며, 신성한 빛이 충만하다. 영성현실은 이미 은총이며 축복이며 행복이다. 이러한 영적 진실을 자각한 상태에서 일상의 의무를 감당해 보라. 저주 같았던 의무들은 축복의 빛을 띠기 시작할 것이다.





 
선택
그러려면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물덩어리인 심리현실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날마다 선택해야 하는 삶의 과제다. 우리는 영성현실을 향유하는 상태에서 의무를 감당하느냐, 심리현실에 속박된 상태에서 의무를 감당하느냐를 매순간 선택해야 한다.

다음 사진을 보자. 이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첫 번째는 일상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 생활현실(R1)이고, 두 번째는 검은 구름이 표상하는 심리현실(R2)이며, 세 번째는 동터오는 하늘이 표상하는 영성현실(R0)이다.

많은 사람이 심리현실(검은 구름)에 예속된 채로 생활현실에 임한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피곤과 스트레스가 뒤범벅인 상태에서 일하고 사람을 만난다. 그러면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돈을 많이 벌면, 성적이 좋으면, 원하는 만큼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감사도 풍성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착각이다.




이런 사람이 있었다.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거야.” 그는 돈을 많이 벌었다. 부자가 된 그가 말했다. “이놈의 소화불량만 나으면 행복할 텐데.” 소화불량이 낫자 그가 말했다. “아내가 있으면 행복하겠지.” 그래서 결혼했지만 불행했다. 이혼하고 재혼했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은 첫 번째 결혼보다 더 고약했다. 두 번째 아내와 헤어지면 행복할 것 같아서 이혼했다. 나이 일흔을 넘기면서 그는 생각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행복할 텐데.”

돈을 많이 벌고, 성공을 바라기 전에 자신이 빛임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도 이미 빛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미 빛의 자녀다. 영성현실은 이미 빛으로 충만하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빛에 먹이를 주는 것, 즉 그 빛을 날마다 관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면의 빛은 더욱 밝아지고 덩달아 행복도 자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일상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이 삶의 순서다. 그게 삶을 균형 있고 조화롭고 찬란하게 살아가는 비결이다.





그 나라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1, 33) 잘 알다시피, “나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경계가 있는 국가가 아니라 “통치”나 “다스림”을 의미한다. 공간 개념이 아니라 “상태”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빛 자체이시며, 빛을 만드신 분이며, 우리를 빛의 자녀로 삼으신 분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빛의 통치가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빛의 통치가 우선이다. 이게 삶의 순서다.

그러므로 매일 내면의 빛을 관상해야 한다. 동터오는 새벽 하늘의 빛을 명상해야 한다. 일상의 의무는 그다음이다. 행복을 돈이나 성공에서 찾지 말라. 먼저 행복해라.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다. 행복은 파랑새 같아서 쫓아다닐수록 도망간다. 행복은 이미 영성현실에서 이루어져 있다.

행복을 돈이나 성공에서 찾지 말라. 먼저 행복해라. 행복은 추구하는 게 아니다. 행복은 파랑새 같아서 쫓아다닐수록 도망간다. 행복은 이미 영성현실에서 이루어져 있다.

같은 논리를 사도 바울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빌 4:6) 이상하다. 하나님께 간구하는 상태는 무언가 바라는 상태이며, 무언가 바라는 상태는 무언가 결핍된 상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한다. 무언가 바라는 결핍 상태에서 어떻게 감사가 가능할까?

심리현실(R2, 검은 구름)의 어둠에서 보면 생활현실(R1)은 결핍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영성현실(R0)의 충만함에서 보면 생활현실은 은총으로 가득하다. 이런 상태를 관상하면 일상의 의무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영성현실에 머무르는 것이 우선이다. 영성현실에서 우리가 이미 빛이며 은총이며 행복임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다. 그게 “삶의 순서”다.
그래서 영성현실에 머무르는 것이 우선이다. 영성현실에서 우리가 이미 빛이며 은총이며 행복임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다. 그게 “삶의 순서”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