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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산으로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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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6회 작성일 23-07-1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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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사 2:1-5)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고전 13:7)
 
 
 
오늘의 본문에서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자고 권유한다. 왜 산으로 올라가자는 걸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신다.(사 2:2) 하므로 삶이 암담할 때 길을 찾고 싶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 싶다면, 한계상황에서 출구를 찾고 싶다면 산으로 올라가라. 아니, 산에 있는 성전을 찾아가라!

물론 성전이라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는 안 된다. 크다고, 웅장하다고, 화려하다고, 최첨단 시설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혹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된 성전, 성전다운 성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성전에 대한 이해와 분별이 필요하다.



성전으로 올라가자
성전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건물 성전.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 성전”이 대표적이다. 이 성전은 바빌론에 의해 파괴됐다.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성전을 다시 세웠다. 이것이 “스룹바벨 성전”이다. “헤롯 성전”도 유명하다. 에돔 사람이었기에 유대 왕으로서 정통성이 없었던 헤롯은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백성의 환심을 사는 데 그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성전은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됐다. 건물 성전의 원형은 출애굽 시절의 회막(성막)이다. (아마 한국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성전은 건물 성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인격 성전. 예수님께 이르러 성전 개념은 획기적으로 변한다. 유대 사람들이 기적(표징)을 요구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유대 사람들이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라고 되묻자, 요한이 설명을 덧붙인다.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 2:21)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었다.(막 14:58) 유대인들에겐 건물이 성전이었지만 예수님에겐 자신(사람)이 성전이었다.

셋째, 내면 성전. 사도 바울은 인격 성전 개념을 급진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음행을 일삼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즉 내면에 거하신다고 힘주어 말한다. 성령은 내면에 계신다. 따라서 내면이 성전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리스도는 참자아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내면에 계신 성령을 인지하려면 참자아가 깨어나야 한다. 내면 성전은 참자아의 성전이기도 하다!

넷째, 네트워크 성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 2:20-21)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여러분이 건물이다. 둘째, 이 건물의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다. 다시 말해 성도라는 건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세워진 곳에 즉 그리스도인의 연대 속에 성령이 거하신다. 결국 공동체적으로 연대하는 네트워크가 성전 곧 교회다.

예수님과 바울에 의해 성전 개념은 확장・심화됐다. 건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내면으로, 내면에서 참자아로, 참자아에서 참자아의 연대로! 따라서 성전으로 올라가자는 예언자 이사야의 권유는 예수 시대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다음을 촉구한다.
 
      첫째, 그리스도께 가라.
      둘째, 내면으로 들어가라.
      셋째, 참자아를 각성하라.
      넷째, 서로 연대하라.
 
그리스도에게 가서, 내면으로 들어가, 참자아를 각성하고, 서로 연대하는 것, 이것이 산에 있는 성전에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를 자주, 오래, 열심히 드나들어도 안 다니는 것만 못하다. 반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내면으로 들어가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의 연대를 시작한다면,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부엌과 마구간도 성전이 될 수 있으며, 일상의 여기저기서, 꼬이고 뒤틀린 관계 속에서 정말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이 참 성전에서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길을 가르치신다
그렇다, 지혜(하나님의 길)는 성전에서 얻는다. 성전이신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가득하다.(골 2: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다.(고전 1:24) 성전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내면으로 들어가,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연대할 때 주님이 가르치시는 길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4a)
주님의 성전에서 가르치는 주님의 길은 분쟁을 판결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는 평화이시라고,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셨다고,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다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한 몸으로 만드셔서 화해시켜셨다고.(엡 2:14-17)





이러한 그리스도의 지혜를 얻고 실현하려면 내면으로 들어가 참자아true-self를 각성해야 한다. 그리고 참자아를 기초로 한 관계를 새로 맺어야 한다. 이때 갈등은 저절로 풀리고 화해가 이뤄진다. 예언자는 구체적인 과정도 알려준다.
“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4b)
한 마디로 무리를 버리라는 얘기다. 상대를 공격하고, 상처를 주는 무기, 판단하고, 비교하고, 비난하고, 무기를 버려야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사랑의 관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무기를 짧은 대화로 묘사한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무얼 하십니까?”
    K가 말했다.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그림을 그리고 비슷해지게 하죠.”
    “사람이 그림과 비슷해지게요, 그림이 사람과 비슷해지게요?”
    K가 대답했다.
    “사람이 그림에 비슷해지게요.”
 
이런 일은 인간관계에서 늘상 일어난다. “사람이 내 그림에 비슷해지게”하는 일 곧 내 그림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일 말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내가 그린 그림대로 해주기를 기대한다. 상대방이 내 그림에 어울리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을 퍼붓는다. 이런 일은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부부 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내 그림을 강요하는 것처럼 지속적인 폭력은 없다.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특정한 표상을 만들지 않는다.(막스 프리쉬) 사랑의 본질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도 없다. 설계도 없이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그림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그림을 절대화할 때 우리는 상대방의 선함과 선의를 보지 못한다. 집을 짓다 보면 설계를 수시로 변경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수시로 내 그림을 찢어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신봉하는 율법, 교리, 이념, 전통, 내 스타일, 내 방식을 깨뜨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상대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사랑은 동상 만드는 사람들처럼 과거를 절대화하지도 않고, 완벽한 설계사들처럼 미래를 예단하지도 않는다. (사랑은) 나의 그림이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의 그림이 실패한 것 또한 사랑의 가능성이 끝난 것이 아님을 믿는 것이다.”
독일의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말이다. 그림을 찢어버릴 때, 상대를 공격하는 “칼”과 “창”은 “보습”이 되고 “낫”이 된다. 생명을 죽이던 무기가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변한다.

이때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를 얻는다. “땅과 육신에 속한 지혜”가 아니라 “위에서 오는 지혜”를! 땅과 육신에 속한 지혜는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진리(진실)를 거스른다. 그 결과는 “온갖 혼란과 악한 행위”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다르다. 순결하고,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다. 이것이 성전인 그리스도에게서 얻는 지혜, 즉 내면으로 들어가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를 통해 연대(관계)할 때 얻는 지혜다.(약 3:13-18)




빛 가운데서 걸어자가
무기를 버리는 것으론 부족하다. 좀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언자는 이렇게 권유한다. “오너라, 야곱 족속아! 주님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자!” 빛 가운데로 걸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안셀름 그륀은 사랑장(고린도전서 13장)을 해설하면서 이런 고백을 한다.
“나는 사랑에 실패할 때 사랑은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고전 13:7)는 성경말씀을 묵상합니다. 나는 환멸을 느낄 때마다 이 문장을 붙들고 놓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그렇게 아프게 할 줄은, 내 믿음을 그렇게 이용해먹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환멸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나는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려 하지 않고, 그 사람 안에도 선을 향한 갈망이 있음을 믿으려고 합니다.”(안셀름 그륀, 『사랑,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믿었던 사람이 마음을 아프게 하면, 내 믿음을 이용해 먹는다면 누구라도 환멸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안셀름은 환멸에 빠져있는 쪽보다 상대방의 선을 향한 갈망을 믿으려는 쪽을 선택한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물론 사랑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하고 냉혹한 구석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로질러 신성한 본질을, 선에 대한 깊디깊은 갈망을 응시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선하고자 하는 갈망이 숨어 있습니다.”




믿음과 함께 답답한 상황을 극복하는 또 다른 길은 “희망”이다. 사랑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panta elpizei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희망을 “기대”expectation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기대가 나의 욕구를 실현하는 것이라면, 희망은 하나님이 열어가실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어로 희망은 “호펜”hoffen인데 이 단어는 “껑충껑충 뛴다” 는 휘펜hüpfen에서 온 말이다. 희망을 품은 사람에겐 생기가 있다. 그래서 희망을 지닐 때 우리의 마음엔 빛이 들고 생기가 돈다. 희망은 상대방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불러낸다.

희망은 다른 사람에게만 갖는 게 아니다. 나 자신과도 관계가 있다. 희망은 나 자신도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은 합리화 이면에 숨은 두려움을 본다.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내 안에 있는 것을, 선한 본질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지신 희망을 희망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롬 8:24-25) 이때 우리는 새로운 너를 발견한다.
“엉클어진 삶의 가시덤불 아래에서 겁먹고 두려워하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희망이 있는 ‘너’를, 이러한 희망 속에 멋진 가능성을 지닌 ‘너’를! 사랑은 ‘남몰래 희망하는 사람’과 함께 용감히 희망합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니다.”(베른하르트 벨테)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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