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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관상적 영성과 창조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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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34회 작성일 23-03-22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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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에서 말하는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를 종종 아주 특별한 기도의 특성(침묵, 정적)이나 단계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관상은 내적 경험만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상황에 대한 반응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상은 기도로 충만한 열림(깨어있음)과 사랑으로 충만한 반응(영적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진실과 우리가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과 연결되어 있음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주변과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갈등과 분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침묵하거나 모른 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과 어울리는 자신을 비난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를 향하여 아흔 아홉 마리를 양떼를 우리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로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복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목자에게 한 마리가 아니고 전부라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 신체에서 가장 보잘 것 없다고 여기던 한 부분이 아플 때, 온몸의 신경이 쓸모없다고 여기던 그곳으로 쏠리는 것처럼 영적인 신경계에서 세상은 누구도 홀로 떨어진 외딴 섬이 아니며, 우리는 모두 우리보다 큰 전체와 연결된 일부입니다. 

우리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와 세상을 분절시키는 배타적인 소속감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며, 생각이 만드는 분리의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알아차림은 우리를 더 큰 공동체의 한 지체로 자신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 관상으로의 초대 中에서 Tilden Edward-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거룩한 사랑 안에 서로 엮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배타적인 자기 정체성을 넘어 다른 사람들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과, 하느님 안에서 우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경청하는 가운데 흘러나오는 연민으로 행동해야 할 필요성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이처럼 열린 인식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뿐 아니라 적(敵)을 위한 행동도 가능하도록 합니다. 관상적 의식 안에서 궁극적인 적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근본적 일체성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길은 모든 하느님의 피조물이 서로 연합되어 있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합니다. 그 진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타자의 해로운 행동에 저항하는 중에도 우리들이 서로 연결된 존재들이라는 것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적을 분리된 대상으로 간주하고, 쳐부수고 제거하여 얻는 평화를 목표로 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너지고 패한 자들은 분노에 찬 억압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고, 언제가 우리에게 반격을 가하여 승자가 될 날을 준비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통제하는 힘이 주는 거만한 자신감, 편협하고 배타적인 공동체 의식, 보이는 적을 제압하여 자신의 문화와 정치적 가치관을 강요하겠다는 목적을 가진 행동보다, 거룩한 사랑 안에 머무는 겸손한 자신감, 감싸 안는 공동체 의식, 정의와 평화의 행동을 향한 부르심을 수용하는 비폭력의 길이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참된 평화의 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공격적인 태도와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 잠시 멈추어 고요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성찰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공격성 깊은 곳에 ‘두려움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여러 곳에서 우리는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만납니다. 천사가 요셉과 마리아에게 수태소식을 전하며(마태 1:20, 루가 1:30) ‘두려워 말라’고 인사합니다.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왜 그렇게들 겁이 많으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가 4:40)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 갔던 연인들이 천사에게 들은 첫 인사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28:10)는 말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하신 첫 인사도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요한 20:19)이었습니다.

복음은 두려움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무지에서 온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햇빛은 태양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영적 스승들은 우리가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착각이며 환상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어떤 죄도, 어떤 세력도, 죽음조차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로마 8:35-39)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육화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미 우리 자신의 진실에 대해서 불신하는 내적 폭력에 의해서 나누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이러한 분리를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바깥으로 투사하게 합니다. 그 투사의 대상은 한 개인이 될 수도 있고, 그룹이 되기도 하고, 민족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분쟁과 전쟁의 뿌리에는 이같은 두려움의 그림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사회와 사회구조 안에 있는 폭력에 저항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 안에 숨겨져 있는 공격성에까지 저항하여야 합니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운동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에게 비폭력을 가르치신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웃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폭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특별히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에서 배웠다고 여러 자리에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모든 진리를 안다는 착각의 덫에 걸려 넘어지기 쉽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배우고 지켜야 할 진리는 나의의 진리, 우리 집단의 진리가 아니라, 궁극적 실재에 기초한 진리이며, 그 진리는 나와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참된 진리일 것입니다.

진정한 관상 수련과 의식은 우리가 분쟁과 전쟁의 영에게로 끌리는 집착을 분별하고 집착으로부터 더 큰 자유로 가는 길을 열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별력 있는 자유는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악마로 만들고, 파괴시키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특별히 중요해 집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들에게 저항할 수 있지만, 저항 중에도 결국 우리가 인류 가족이며 끝내는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저항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존 울만 John Woolman은 미국이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던 1720부터 1772년까지 뉴저지에 살았던 퀘이커Quaker라는 별칭을 지닌 친우회Society of Friends 교도였습니다. 당시 그와 함께 어울렸던 상인들과 농부들로 구성된 친우회 회원들은 그 사람이 노예를 얼마나 거느렸느냐에 따라 영향력의 크기를 평가하곤 하였습니다. 노예를 두지 않았던 재단사 울만은 인간의 평등함에 대한 퀘이커교도의 신념과 많은 친우회교도의 상류층이 노예를 데리고 다니는 모순을 보며 마음으로 몹시 괴로워하였습니다. 울만은 그러한 모순을 무시하며 기술적인 속임수를 쓰거나 그 갈등을 폭력적으로 분출하여 긴장을 해소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공동체가 그 긴장을 정직하게 끌어안고 성심誠心으로 노예를 해방하게 함으로써 이를 해결하였습니다.

공동분별을 통해 의사결정을 하는 퀘이커교도 전통에 따라 울만은 지역회합에서 노예해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의안으로 내놓았으나 의견을 통일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만이 그 문제에 절대적인 성심으로 임하는 모습에 다른 회원들은 그를 지지하기로 동의했습니다. 그 뒤로 20년 동안 울만은 동부 연안을 따라 여러 지역을 방문하면서 신앙과 행동 사이에 가슴 아픈 모순을 친우회 회원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울만과 그의 가족은 진실의 명령에 대한 일관된 증언과 깊게 느껴지는 비통함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긴장을 마다하지 않고 무려 20년 동안 끌어안았습니다. 결국 퀘이커 교도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예를 해방시킨 종교공동체가 되었는데 이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80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퀘이커는 1783년 인간을 노예화시키는데서 오는 ‘복합적인 악’과 ‘정의롭지 못한 사업’을 시정하라고 의회에 탄원하였고 1827년 이후 케이커교도들은 미국의 노예들이 자유국가인 카나다로의 탈출을 돕는 ‘지하철도’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바로 투표에 부쳐 노예를 소유한 다수가 뜻을 관철하도록 하지도 않았고, 성가신 울만을 추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긴장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리라 믿으면서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신념을 시험하였고, 통일된 의견에 도달하기까지 애를 써서 결국 역사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1960년대 미국 흑인민권 운동을 하면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로부터 온갖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꿋꿋히 정의를 향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역시 정의의 사도였습니다. 그는 협박과 죽음의 위험 앞에서 적대자들에게 쓴 편지에서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역설하였습니다. 

“우리는 남부 전역에서 우리를 계속 억압하려는 백인 형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고통을 가하는 만큼 고통을 견디는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물리적 힘에 영혼의 힘으로 맞설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미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양심상 여러분의 악법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우리에게 행하십시오. 우리 아이들을 위협하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하찮은 존재라고, 너무 비천한 존재라고 말하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의 집을 폭파하십시오, 아침 일찍 우리 교회를 지나다가 마음 내키면 그곳도 폭파하십시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견디는 힘으로 여러분을 지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의 자유를 얻는데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양심에 호소함으로 여러분까지 얻게 될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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