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하나님은 공동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63회 작성일 23-03-14 14:43본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고후 13:13)
요즘은 삼대가 예수를 믿는 집안이 적지 않다. 우리 집안만 해도 나와 아들, 손녀 삼대가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신학생 중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목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이 꽤 있다. 한국 기독교도 그만큼 연륜이 쌓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신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학생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사고, 아버지는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으며, 자신은 영성지도자가 될 꿈을 갖고 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이 세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먼저 “본질” 차원에서 묘사할 수 있다. 세 사람은 각각 구별되는 인격이지만 “인간성”이라는 존재의 본질에서 보면 하나다. 하나의 본질에 세 명의 다른 인격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세 사람은 다른 일을 한다. 할아버지는 목사이고, 아버지는 선교사이며, 아들은 영성지도자를 꿈꾸는 신학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세 사람은 하나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함께 목회를 할 수도 있도, 함께 선교를 할 수도 있고, 함께 공부할 수도 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깊은 사랑과 사귐 속에서 서로에게 참여한다. 세 사람은 사랑 속에서 하나다. “본질”이나 “행위”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곧 “함께-하나”(comm-unity)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한다. 요즘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성 패트릭의 기도도 삼위일체 신앙으로 시작한다.
나 오늘 일어납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권능과 기도에 힘입어
나 오늘 일어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삼위임을 믿으며,
성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고백하며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난해한 이론이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니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삼위일체론을 “형이상학적 미친 짓거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인간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삼위일체론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삼위일체론 입장에서 보면 인간 이성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향 북아프리카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당시 그는 『삼위일체론』을 집필 중이었다. 모래 위를 걷고 있는데 한 소년이 손으로 바닷물을 떠서 자기가 파놓은 모래 구덩이로 달려가 붓는 것을 발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소년은 바다를 비우기 위해 자기가 판 모래 구덩이에다 물을 옮겨 담고 있는 거라고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광대한 바닷물을 어찌 이 작은 구덩이에 담을 수 있겠니? 그러자 소년도 똑같이 비웃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한 신비를 책 한 권 분량에 담아내려고 하세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광대한 바닷물을 어찌 이 작은 구덩이에 담을 수 있겠니? 그러자 소년도 똑같이 비웃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한 신비를 책 한 권 분량에 담아내려고 하세요?
무한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좁은 머리에 담을 수 없다. 우리의 이해력이란 소년이 판 모래 웅덩이에 불과하다. 모래 웅덩이에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유한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Si comperhendis non est Deus)
하지만 19세기 성공회 신학자 찰스 고어(1853-1932)도 말했듯이 “우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도전하고, 이를 수 없는 곳을 오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도리밖에 없다. 우리는 종교의 심원한 것들을 믿음으로 경배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인간의 언어에 맡겨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고전 13:12)을 희망하며 말이다.
삼위일체론의 발전
다음 두 구절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고후 13:13)
신약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성부・성자・성령을 포괄하지 않고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고후 1:21-22)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엡 1:10, 13)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갈 4:6)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 2:20-22)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살후 2:13-14)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증언한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인 동시에 하나이시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독교 신학은 “본질”과 “행위” 두 가지 범주로 사유했다. 첫째,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이다. 성부・성자・성령은 이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다. “하나의 본질-세 인격(위격)”(una substantia-tres personae)이다.(테르툴리아누스)
앞의 예로 설명하자면,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각각 독립된 인격이지만 인간성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샘과 우물과 시내의 비유”로 설명한다. 우물과 시내는 샘에서 흘러나오며, 셋 모두는 동일한 본질, 곧 물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셋은 각기 다른 실재이기도 하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를 “샘과 우물과 시내의 비유”로 설명한다. 우물과 시내는 샘에서 흘러나오며, 셋 모두는 동일한 본질, 곧 물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셋은 각기 다른 실재이기도 하다.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이 같아도 “행위”(사역)는 다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런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른다. 동일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구주의 모습으로 계시된다. 이런 하나님을 “성자”라고 부른다.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우리를 성화시키고 완전하게 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성부・성자・성령은 다른 일을 하지만 구원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앞에서 예를 든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달라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처럼.
본질의 범주로 이해하는 방법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하고 (인격은 서로 달라도 내적 본질이 같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범주로 이해하는 방법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데 비해 이해하기가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하지 않으면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성부・성자・성령은 실재를 결여한 “기능”이나 “현상”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활동은 존재(신성이라는 본질)를 전제한다.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토대 위에서 경륜적 삼위일체가 가능하다는 얘기겠다.
공동체적 삼위일체
본질에 관심 갖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군주적 일신론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 행위에 주목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기능으로 축소할 위험이 있으며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면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는 길은 없을까? “페리코레시스”(Perechoresis) 삼위일체론이 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리스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ορησις)는 “돈다, 순환한다”(going round, rotation)는 뜻이다. 이것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세 인격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관계와 사귐 속에서 서로 순환한다. 이를 상호내주, 상호내재, 상호침투라고도 한다. 구원사 안에서 성부・성자・성령은 함께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이나 행위가 아니라 관계와 사귐 속에서 하나다. 다시 말해 성부・성자・성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함께-하나”(comm-unity)다. 그래서 공동체다.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은 공동체이며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순환하는 사랑, 상호내재하는 사랑(perichoretic love)을 통해 자신의 관계적・공동체적・사회적 본질을 완성한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관계와 친밀한 사귐 속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함께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함께-하나”(comm-unity)다. 그래서 공동체다.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은 공동체이며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일하신다.
상호내재를 통해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인격)은 서로에게 현존하며, 이때 세 위격은 하나다. 상호내재는 서로를 구별하면서도 서로를 하나로 묶는다. 상호내재를 통해 성부・성자・성령은 공동체적으로 연합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합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령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성자는 성부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령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성령은 성부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자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침투하여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성자는 성부 성령 안에, 성령은 성자와 성령 안에 머무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말해, 인간이라는 본질을 공유하는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사랑의 연합 속에서 서로에게 침투하여 공동체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공동체적으로 활동한다.
하나님을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로 이해하면 매우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이 공동체라면 하나님의 형상도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는 것은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참자아라고도 부르는데 하나님이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면, 참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공동체적 본질을 각성하는 것이며,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껍질을 벗고 공동체로 전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공동체적 본질을 각성하는 것이며,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껍질을 벗고 공동체로 전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 인간조건
작년에 “기도와 상상력”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영적 여정에서 분별은 매우 중요하다. 영적 여정에서 필요한 분별은 무엇보다 인간 조건(human conditions)에 대한 분별이다. 성경 창세기의 원역사(특히 1~2장)는 타락 이전의 인간 조건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 1:27)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언명으로서 영적 여정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둘째, 인간은 흙과 생기로 이뤄진 생명체다. 다시 말해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의 통합체다.(창 2:7) 영성생활이란 욕망 영역을 초월하여 신성 영역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줄기찬 수행이다.
셋째, 인간은 돕는 사람과 짝이 필요한 관계적이며 공동체적 존재다.(창 2:18) 기독교 영성은 관계의 영성이며 공동체 영성이다. 따라서 영성은 심산유곡의 암자에서 득도해야 깊어지지 않고, 일상의 관계맺음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성장한다.
기독교 영성은 관계의 영성이며 공동체 영성이다. 따라서 영성은 심산유곡의 암자에서 득도해야 깊어지지 않고, 일상의 관계맺음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성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영적 여정의 목표라면, 존재의 스펙트럼은 영적 여정의 방향과 질을 결정하는 조건이며, 관계와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완성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행복한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 사랑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공동체로 믿으면 신앙생활과 영성생활도 공동체적으로 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침투・상호내재를 통해 사랑으로 연합하면서 공동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하나되어”(comm-unity) 공동체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우리는 지금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침투・상호내재를 통해 사랑으로 연합하면서 공동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하나되어”(comm-unity) 공동체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 이민재
(고후 13:13)
요즘은 삼대가 예수를 믿는 집안이 적지 않다. 우리 집안만 해도 나와 아들, 손녀 삼대가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 신학생 중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목사가 되겠다는 학생들이 꽤 있다. 한국 기독교도 그만큼 연륜이 쌓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신학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학생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개척교회를 섬기는 목사고, 아버지는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으며, 자신은 영성지도자가 될 꿈을 갖고 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다. 이 세 사람의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먼저 “본질” 차원에서 묘사할 수 있다. 세 사람은 각각 구별되는 인격이지만 “인간성”이라는 존재의 본질에서 보면 하나다. 하나의 본질에 세 명의 다른 인격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다.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세 사람은 다른 일을 한다. 할아버지는 목사이고, 아버지는 선교사이며, 아들은 영성지도자를 꿈꾸는 신학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세 사람은 하나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함께 목회를 할 수도 있도, 함께 선교를 할 수도 있고, 함께 공부할 수도 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인격이지만 깊은 사랑과 사귐 속에서 서로에게 참여한다. 세 사람은 사랑 속에서 하나다. “본질”이나 “행위”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곧 “함께-하나”(comm-unity)다.
이상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실마리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한다. 요즘 우리가 암송하고 있는 성 패트릭의 기도도 삼위일체 신앙으로 시작한다.
나 오늘 일어납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권능과 기도에 힘입어
나 오늘 일어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삼위임을 믿으며,
성 삼위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고백하며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난해한 이론이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니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삼위일체론을 “형이상학적 미친 짓거리”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한다. 인간 이성의 입장에서 보면 삼위일체론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삼위일체론 입장에서 보면 인간 이성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
삼위일체론과 관련된 아우구스티누스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향 북아프리카의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당시 그는 『삼위일체론』을 집필 중이었다. 모래 위를 걷고 있는데 한 소년이 손으로 바닷물을 떠서 자기가 파놓은 모래 구덩이로 달려가 붓는 것을 발견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소년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물었다.
너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니? 소년은 바다를 비우기 위해 자기가 판 모래 구덩이에다 물을 옮겨 담고 있는 거라고 대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광대한 바닷물을 어찌 이 작은 구덩이에 담을 수 있겠니? 그러자 소년도 똑같이 비웃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한 신비를 책 한 권 분량에 담아내려고 하세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 광대한 바닷물을 어찌 이 작은 구덩이에 담을 수 있겠니? 그러자 소년도 똑같이 비웃었다.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한 신비를 책 한 권 분량에 담아내려고 하세요?
무한한 하나님의 신비를 인간의 좁은 머리에 담을 수 없다. 우리의 이해력이란 소년이 판 모래 웅덩이에 불과하다. 모래 웅덩이에 바다를 담을 수 없듯이, 유한한 이성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Si comperhendis non est Deus)
하지만 19세기 성공회 신학자 찰스 고어(1853-1932)도 말했듯이 “우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에 도전하고, 이를 수 없는 곳을 오르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도리밖에 없다. 우리는 종교의 심원한 것들을 믿음으로 경배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인간의 언어에 맡겨야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고전 13:12)을 희망하며 말이다.
삼위일체론의 발전
다음 두 구절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성경의 대표적인 구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고후 13:13)
신약성경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성부・성자・성령을 포괄하지 않고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고후 1:21-22)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엡 1:10, 13)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갈 4:6)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 2:20-22)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셨습니다.”(살후 2:13-14)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증언한다.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삼위인 동시에 하나이시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기독교 신학은 “본질”과 “행위” 두 가지 범주로 사유했다. 첫째, 하나님은 최고의 본질이다. 성부・성자・성령은 이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은 서로 구별되는 인격이다. “하나의 본질-세 인격(위격)”(una substantia-tres personae)이다.(테르툴리아누스)
앞의 예로 설명하자면,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각각 독립된 인격이지만 인간성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샘과 우물과 시내의 비유”로 설명한다. 우물과 시내는 샘에서 흘러나오며, 셋 모두는 동일한 본질, 곧 물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셋은 각기 다른 실재이기도 하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삼위일체를 “샘과 우물과 시내의 비유”로 설명한다. 우물과 시내는 샘에서 흘러나오며, 셋 모두는 동일한 본질, 곧 물이라는 본질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 셋은 각기 다른 실재이기도 하다.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이 같아도 “행위”(사역)는 다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런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른다. 동일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구주의 모습으로 계시된다. 이런 하나님을 “성자”라고 부른다. 동일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우리를 성화시키고 완전하게 하신다. 이런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성부・성자・성령은 다른 일을 하지만 구원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하나다. 앞에서 예를 든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달라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점에서 같은 것처럼.
본질의 범주로 이해하는 방법을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하고 (인격은 서로 달라도 내적 본질이 같다는 의미에서), 행위의 범주로 이해하는 방법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런 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데 비해 이해하기가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질에 근거하지 않으면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성부・성자・성령은 실재를 결여한 “기능”이나 “현상”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활동은 존재(신성이라는 본질)를 전제한다. 경륜과 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뜻에서 칼 라너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하기도 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의 토대 위에서 경륜적 삼위일체가 가능하다는 얘기겠다.
공동체적 삼위일체
본질에 관심 갖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지나치게 추상적이며 군주적 일신론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 행위에 주목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기능으로 축소할 위험이 있으며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면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는 길은 없을까? “페리코레시스”(Perechoresis) 삼위일체론이 그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리스어 페리코레시스(περιχορησις)는 “돈다, 순환한다”(going round, rotation)는 뜻이다. 이것을 삼위일체에 적용하면 하나님의 세 인격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관계와 사귐 속에서 서로 순환한다. 이를 상호내주, 상호내재, 상호침투라고도 한다. 구원사 안에서 성부・성자・성령은 함께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본질이나 행위가 아니라 관계와 사귐 속에서 하나다. 다시 말해 성부・성자・성령은 공동체적으로 하나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함께-하나”(comm-unity)다. 그래서 공동체다.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은 공동체이며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순환하는 사랑, 상호내재하는 사랑(perichoretic love)을 통해 자신의 관계적・공동체적・사회적 본질을 완성한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관계와 친밀한 사귐 속에서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함께 일하신다.
성부・성자・성령은 사랑의 친밀한 사귐 속에서 “함께-하나”(comm-unity)다. 그래서 공동체다. 성부・성자・성령의 본질은 공동체이며 구원을 위해 공동체적으로 일하신다.
상호내재를 통해 성부・성자・성령 세 위격(인격)은 서로에게 현존하며, 이때 세 위격은 하나다. 상호내재는 서로를 구별하면서도 서로를 하나로 묶는다. 상호내재를 통해 성부・성자・성령은 공동체적으로 연합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연합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령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성자는 성부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령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성령은 성부 안에 온전히 현존하고, 성자 안에 온전히 현존한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침투하여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성자는 성부 성령 안에, 성령은 성자와 성령 안에 머무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비유적으로 말해, 인간이라는 본질을 공유하는 신학생과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사랑의 연합 속에서 서로에게 침투하여 공동체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공동체적으로 활동한다.
하나님을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로 이해하면 매우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하나님이 공동체라면 하나님의 형상도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성하는 것은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참자아라고도 부르는데 하나님이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공동체의 성격을 띤다면, 참자아를 실현하는 것은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공동체적 본질을 각성하는 것이며,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껍질을 벗고 공동체로 전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은 공동체적 본질을 각성하는 것이며, 참자아로 전향하는 것은 개인주의의 껍질을 벗고 공동체로 전향하는 것을 의미하며, 참자아에 뿌리내리는 것은 공동체의 삶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로 산다는 것은 공동체의,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별, 인간조건
작년에 “기도와 상상력”이라는 제목으로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영적 여정에서 분별은 매우 중요하다. 영적 여정에서 필요한 분별은 무엇보다 인간 조건(human conditions)에 대한 분별이다. 성경 창세기의 원역사(특히 1~2장)는 타락 이전의 인간 조건에 대해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 1:27)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언명으로서 영적 여정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둘째, 인간은 흙과 생기로 이뤄진 생명체다. 다시 말해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의 통합체다.(창 2:7) 영성생활이란 욕망 영역을 초월하여 신성 영역에 삶의 뿌리를 내리기 위한 줄기찬 수행이다.
셋째, 인간은 돕는 사람과 짝이 필요한 관계적이며 공동체적 존재다.(창 2:18) 기독교 영성은 관계의 영성이며 공동체 영성이다. 따라서 영성은 심산유곡의 암자에서 득도해야 깊어지지 않고, 일상의 관계맺음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성장한다.
기독교 영성은 관계의 영성이며 공동체 영성이다. 따라서 영성은 심산유곡의 암자에서 득도해야 깊어지지 않고, 일상의 관계맺음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형성되고 성장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영적 여정의 목표라면, 존재의 스펙트럼은 영적 여정의 방향과 질을 결정하는 조건이며, 관계와 공동체는 영적 여정을 완성하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행복한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으면 사랑의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공동체로 믿으면 신앙생활과 영성생활도 공동체적으로 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침투・상호내재를 통해 사랑으로 연합하면서 공동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하나되어”(comm-unity) 공동체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우리는 지금 페리코레시스 즉 상호침투・상호내재를 통해 사랑으로 연합하면서 공동체이신 하나님을 향해 “함께-하나되어”(comm-unity) 공동체적으로 걸어가고 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