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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의의 빛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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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35회 작성일 23-03-14 14:41

본문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 5:14)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시 37:6)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할 때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나타나듯이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실을 통과할 때 다양한 덕의 열매가 열린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고 닮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발산하는 덕의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랑의 빛을 비춘다. 기쁨의 빛을 비춘다. 평화의 빛을 비춘다. 인내의 빛, 자비의 빛, 착함의 빛, 신실의 빛, 온유의 빛, 절제의 빛을 비춘다.

그리스도인에게서 나오는 덕의 빛 가운데 하나가 “의의 빛”이다. 시편 시인은 빛을 “의”와 관련시킨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의 “의를 빛과 같이 빛나게 하시고,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신다.”(시 37:6) 그리스도인은 의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다. 그러면 의의 빛이란 무엇일까?

“의”는 “옳다”는 뜻이다. 의(義)라는 한자는 양(羊)과 나(我)가 합해진 글자다. 그리고 양은 나 위에 있다. 소 돼지 등 가축이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지만, 양은 양고기 외에도 양가죽과 양젖, 심지어 양털도 제공한다. 자기 전부를 내준다.

양은 자기를 희생하여 타자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를 상징한다. “나”(我)가 이기심을 상징한다면 “양”(羊)은 이타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의”(義) 자를 보면 양은 나 위에 있다. 양이 나를 다스리는 모양새다. 이타성이 이기심을 다스릴 때 “옳음”이 발생한다. 그게 “의”다. 따라서 “의”란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성을 발현하는 인간의 성정이라 할 수 있다.




양은 자기를 희생하여 타자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를 상징한다. “나”(我)가 이기심을 상징한다면 “양”(羊)은 이타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의”(義) 자를 보면 양은 나 위에 있다. 양이 나를 다스리는 모양새다. 이타성이 이기심을 다스릴 때 “옳음”이 발생한다. 그게 “의”다. 따라서 “의”란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성을 발현하는 인간의 성정이라 할 수 있다.


법률적 의
의에는 세 차원이 있다. 첫째, “법률적” 의다. 구약성경은 법률적 의를 매우 강조한다. 재판장은 의인과 죄인을 잘 분별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겨서 그들이 법정에 서게 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옳은 사람에게는 무죄를, 잘못한 사람에게는 유죄를 선고해야 합니다.”(신 25:1) 우리 사회처럼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왕도 의로워야 한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의를 내려달라고 기도한다. 그래야 불쌍한 백성을 “공의로 판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시 72:1) 의로운 왕은,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운 시절, 가난한 백성이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때 가난한 사람의 목숨을 건져준다. 이태원 참사처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긴다.”(시 72:13-14) 의를 이루면 왕은 백성에게 “풀밭에 내리는 비” “땅에 떨어지는 단비” 같이 생명을 살리는 존재가 된다.(시 72:6)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기억되고, 그는 영광을 받으며 높아진다.”(시 112: 6, 9)

법률적 의가 부자와 권력자 편을 들지 않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할 때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진다. 그래서 시인 아삽은 호소한다.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라.”(시 82:3) 예언자 이사야도 외친다.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사 1:17)

법률적 의는 사회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의다. 이 의가 확립되어야 백성이 평화롭게 산다. 대한민국의 정부와 국회와 사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법률적 의를 공정하게 펴기 위해서다. 정부가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려하지 못하고, 국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법을 만들지 못하며, 법원이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편든다면, 그러한 나라는 있으나 마나다.




 
윤리적 의
두 번째 의는 “윤리적” 의다. “윤”(倫)에는 “무리”라는 뜻이 있고, “리”(理)는 “이치”를 뜻하므로 “윤리”란 무리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이치를 뜻한다. 물리(物理)가 사물의 이치라면, 윤리는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이치 즉 인간관계의 도리다. 유교에서는 부모와 자식[父子], 왕과 신하[君臣], 남편과 아내[夫婦], 어른과 아이[長幼], 친구와 벗[朋友]을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본다. 이게 오륜(五倫)이다. 오륜의 실천덕목이 바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다.

성경은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윤리를 제시한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따위가 그렇다. 또 성경은 사회경제적 약자를 배려하라고 신신당부한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주십시오.”(신 15:11) 이러한 배려는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에게까지 펼쳐진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아라.”(사 22:3)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아라.(사 22:3)

성경의 윤리적 의는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짐승까지 배려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안식일이다. 안식일 법에 따라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 쉬는 이유는 사회적 약자를 비롯하여 짐승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출 23:12)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성경의 윤리적 의는 사회적 약자나 짐승뿐 아니라, 원수가 소유한 짐승까지 배려하라고 당부한다. “너희는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출 23:4-5)




 
영성적 의
세 번째 의는 “영성적” 의다. 영성적 의란 무엇일까? 법률적 의가 사회적이고, 윤리적 의가 관계적이라면, 영성적 의는 본질적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도 하고 관계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영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성적 의란 인간 존재의 영적 본질을 자각하는 것에서 싹튼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고, 겉사람뿐 아니라 속사람 차원이 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신성한 뿌리인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이다. 영성적 의란 인간 존재의 본질 차원을 발견하는 것이므로 “존재론적 의” 또는 “심층적 의”라고 일컬을 수도 있다.

영성적 의의 첫걸음은 자신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동일한 삶의 상황・현실・조건・환경・사람에 대해 반응하는 자신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라. 대상(상황・현실・조건・환경・사람)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대상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마음・분위기가 바뀌는 때가 있다. 혐오가 연민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가 용납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허구한 날 술마시는 남편이 미웠는데 어느 날 연민을 갖기도 하고, 원하는 성적을 받아오지 못하는 아이에게 화가 났는데 어느 날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대상이 바뀌지 않았는데 나의 내면 상태는 분명히 달라졌다. 남편이 술을 끊지 않았는데도 연민의 마음이 들었고, 아이의 성적이 원하는 만큼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사랑이 샘솟았다. 왜 그렇게 됐을까? 우리에게는 표층적 사건이나 현상에 자극받는 나, 외적 현실이나 상황에 따라 형성되고 그것에 반응하는 나 외에 “또 다른 “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참자아”라고 일컫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표층적 사건이나 현상에 자극받는 나, 외적 현실이나 상황에 따라 형성되고 그것에 반응하는 나 외에 “또 다른 “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참자아”라고 일컫는 것이다.

자신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 영성적 의(영적 옳음)의 첫걸음이다. 그다음은 참자아로 돌아서는 것이다. 돌아선다는 것은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참자아를 직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자아를 직관하는 일이 반복될 때 점차 참자아 수준에 뿌리내리게 되고, 참자아를 기초로 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게 바로 “참자아로”(as true self) 사는 삶이다.

이때 우리는 겉사람이나 거짓자아가 아니라 참자아를 기준으로 선택하고 판단한다. 참자아의 판단은 “비판단”(non-judgemental)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다름도 차이도 심지어 일탈도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고 일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편견과 오해, 배제와 혐오에서 벗어난다. 이때 “다양성 속의 일치”(unity in diversity)가 이뤄진다. 공동체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교회가 그런 곳이다.

법률적 의는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여,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아갈 때 왜곡되지 않는다. 진정으로 가난한 백성을 “억압과 폭력에서 건져내고”, “그들의 피를 귀중하게” 여긴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고귀한 백성임을 알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도 참자아를 기초로 할 때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 산상설교가 그렇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윤리이지만 참자아 차원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실천할 수 없는 윤리다. 참자아의 능력 없이 자기 의지로 실천하려고 할 때 산상설교는 무거운 멍에가 되고 만다. 그리스도의 윤리는 무거운 멍에가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마 11:30)

영성적 의는 법률적 의의 기초이며, 윤리적 의의 동력이다. 영성적 의가 뒷받쳐주지 않을 때 법률적 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도구로 전락하며, 윤리적 의는 당위라는 이름의 무거운 굴레로 변질한다. 영성적 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아무리 법률이 정교해도 법 기술자들에 의해 불법이 판을 치게 된다. 영성적 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종교적 율법과 이념적 도그마에서도 헤어나지 못한다. 영성적 의는 사회경제적 평등의 기초이며, 율법과 도그마로부터 해방하는 동력이다.



 
어떻게
그러면 어떻게 영성적 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여,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아갈 수 있을까? “義”라는 글자에 답이 들어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義”는 羊과 我의 합성어다. 기독교에서 양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전부를 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따라서 의라는 글자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의는 그리스도와 나의 연합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확증하는 것이 세례다. 믿음과 세례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합하여 나의 옛사람 즉 거짓자아가 죽는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새생명 즉 참자아로 살아난다.

둘째, 그리스도는 나 위에 계셔야 한다. 날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내 자아를 다스려야 한다. 그래야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 수 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영성적 의가 태어나고[중생/칭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때 영성적 의는 무럭무럭 자란다.[성화/완전]

결국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여,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사는 영성적 의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 완성된다. 이때 우리의 의는 빛과 같이, 한낮의 햇살처럼 빛날 것이다. 참자아의 향기가, 속사람의 활력이, 새사람의 생기가, 하나님 형상의 광채가!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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