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알아차림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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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21회 작성일 23-03-14 14:24본문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마 5:3,5)
“살수록 남편을 잘 모르겠어요.”
얼마 전 한 길벗에게서 들은 말인데, 나는 이렇게 맞장구쳤다.
“그래요, 오랫동안 같이 산 부부들도 서로를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나도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아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아마 대개는 나의 겉모습이 나인 줄 알 것이다. 가정에서 나는 부모님의 아들이고, 형제 가운데 하나이며, 아내의 남편, 아들의 아버지, 손주의 할아버지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나, 글을 통해서 만나는 나, 상담할 때 형성된 이미지를 나로 여길 것이다.
물론 관계에서 주어지는 이름이나 일과 관련된 이미지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나, 욕심과 편견,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나, 인정받고 돋보이고 싶어 하는 나, 허영과 허위의식으로 들떠있는 나, 두려움이나 수치심, 좌절감을 느끼는 나는 모를 것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순수하고 고결한 나,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나, 온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나는 더욱 모를 것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나는 세 차원이 겹쳐진 존재다. 첫째 차원은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나로 성경은 이를 “겉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사회적 자아라 할 수 있겠다. 둘째 차원은 겉사람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나로 토머스 머튼은 이를 “거짓자아”라고 불렀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에고라고도 한다. 셋째 차원은 겉사람과 거짓자아 너머에 있는 나로 이를 일컬어 “참자아”라고 한다. 나의 영적 자아다. 성경은 이것을 영, 속사람, 마음에 숨은 사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나에 대한 알아차림
나의 겉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책임과 당위, 실적과 성적의 관점에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내가 책임을 다하고 좋은 업적을 내면 멋진 남편 훌륭한 아빠 유능한 목사로 인정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뿐일까, 어쩌다 나의 거짓자아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욕심과 무의식의 충동, 불순과 불의, 허영과 교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구제불능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며, 나는 좌절감과 수치심에 휩싸일 것이다. 이렇게 일부로 평가받는다면 슬플 것이다.
겉사람과 거짓자아뿐 아니라 참자아까지 볼 때 비로소 사람들은 나의 실상, 나의 전체를 보기 시작한다. 나의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사람이라야 한다. 자신을 아는 만큼 남도 보이는 법이니까.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지 않는가. 가까이에 자기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 겉사람의 초라한 성적이나 거짓자아의 위선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자아는 새로운 관계의 지평을 열어준다. 평가하고 비교하던 관계는 용납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변형된다. 참자아의 깊고 너른 품, 그 품의 충만함과 넉넉함은 쓸모없다고 평가받은 겉사람도 받아들이고, 실망스럽다고 낙인찍힌 거짓자아도 용납한다. 관계의 기적이다. 이제 비로소 편견이나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질로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참자아라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해서 사람들은 나를 볼 때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통해 만들어진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 색안경이 바로 선입견・편견・고정관념 같은 생각이며, 원망・미움・분노 같은 감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마 7:3)는 이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들보를 빼내지 않고 나를 보면 나의 본질과 실상은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파묻히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좋아하면 좋은 것만, 싫어하면 싫은 것만 본다.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것들이 빨갛게 보이듯 나에게 있는 파란 것도 빨갛게 본다.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념화”를 통해 조작된다. 이것은 나에 대한 폭력이다. 나의 본질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계에서는 이런 패턴이 작동한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 그렇다. 실적을 올리지 못한 직원은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상사의 괴물 같은 거짓자아에서 나오는 몰상식을 견뎌야 한다. 그게 바로 갑질이다. 회사에서 참자아로 존중받을 일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겉사람의 성적으로 평가될 뿐, 참자아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든 학생이든 겉사람의 성적에 따른 평가가 일상화되면, 거짓자아의 마성적 힘에 사로잡히기 쉽다. 참자아가 활성화되지 않아 거짓자아의 무의식적 횡포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모든 문제는 어쩌면 “참자아에 눈먼 겉사람의 절대화”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맺어지는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들 사이나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패턴이 작동한다. 참자아를 바탕으로 한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모자식 관계나 부부관계, 심지어 연인 사이에서도 그런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부분의 관계가 참자아를 배제한 채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통해 형성된 관념과 이미지를 통해 이뤄진다. 자신의 들보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겠다는 폭력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너에 대한 알아차림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남을 보는 시선에도 해당한다. “나”가 세 차원이 겹쳐있는 존재인 것처럼 “너”도 그렇다. 너에게도 겉사람, 거짓자아, 참자아 세 차원이 있는 것이다. 설명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 너의 세 차원을 너1, 너2, 너0라고 표시해보자. (나의 세 차원도 이렇게 표시할 수 있다. 나1, 나2, 나0) “너1”은 사회적 자아인 겉사람 차원을, “너2”는 자기중심적인 에고인 거짓자아 차원을, “너0”는 영적 자아인 참자아 차원을 표시한다. 세 번째 차원을 “너3”로 하지 않은 것은 참자아가 여러 차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들보가 상징하는 고정관념이 제로 상태 즉 무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너를 볼 때 나는 너1과 너2를 통해 만든 색안경을 쓰고 본다. 편견이나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으로 너의 껍데기를 볼 뿐, 너의 본질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나의 참자아(나0)를 알아차리지 않는 한, 너0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너”를 나의 고정관념에 가두고 너를 파편화한다.
너1이 기대에 못 미치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힐난하며, 성적이 안 좋으면 누굴 닮아 그러냐며 조롱한다. 어쩌다 너2를 보기라도 하면 크게 실망하면서 위선자라느니 철면피라느니 하며 야비할 정도로 비난한다. 제 눈의 들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겠다며 횡포를 부린다.
나0를 각성하지 못한 나는 너0를 보지 못하면서 너를 슬프게 한다. 나0를 깨닫지 못한 나는 너0를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너를 수치심으로 물들인다. 나0에 무지한 나는 너0와 교감하지 못하면서 너에게 모욕감을 주고 상처를 입힌다. 나0에 눈먼 나는 너의 신성을 직관하지 못하며, 너0의 무한성을 감지하지 못한다.
너의 도구화가 시작된다. 너는 나의 욕망충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너는 내가 함부로 대하고 쓰다가 버려도 되는 물건일 뿐이다.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도 소중한 존재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 너는 타락한다.
나0의 깊고 너른 품과 그 품의 충만함과 넉넉함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너0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모르므로 너1의 부족함과 너2의 실망스러움을 품지 못한다. 용납하고 존중하는 관계는 꿈꾸지도 못하며, 나와 너는 비교와 평가의 굴레에 예속되고 만다. 관계는 시나브로 악연의 늪에 빠져든다.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남을 보는 시선에도 해당한다. “나”가 세 차원이 겹쳐있는 존재인 것처럼 “너”도 그렇다. 너에게도 겉사람, 거짓자아, 참자아 세 차원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눈
나의 깊은 곳(나0)까지 통찰하는 너의 시선은 불가능한 것일까? 너의 심연(너0)까지 들여다보는 나의 눈은 불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겉사람의 경력에 현혹되지 않고 거짓자아의 허영에 속지 않으면서 서로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자아의 깊고 넓은 품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간단하다. 예수님 말씀대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제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면 된다. “색안경”을 벗으면 된다. 대상에 대한 개념화를 멈추고, 편견과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을 비우면 된다. 나와 너에 대해 겉사람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거짓자아가 만들어낸 허상을 벗겨내면 된다. 서로를 개념화하기 이전의 순수 자아, 서로에 대한 허상을 만들기 이전의 본질 형상을 알아차리면 된다. 사회적 지위나 학벌, 성적이나 실적으로 덧칠되기 이전의 순수 자아를 직관하는 눈을 뜨면 된다.
“안식일의 눈”이 이런 눈일 것이다.(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안식일의 눈이란 “대상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긴” 눈이며,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눈”이다. 그 눈은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되는 날의 고요의 흔적을 되살려낸다.” 따라서 그 눈은 개념화를 중지하고 대상이 창조되던 순간의 본질을 직관한다. 태초의 남자 사람이 여자 사람을 자기의 “뼈와 살”(참자아)로 파악한 것처럼 개념과 이미지를 덧붙이기 이전의 너를 본다. 편견과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 너를 본다.
또한 안식일의 눈은 “응시하는 대상 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거의 무시하는 듯한 시선”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눈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 자체에 머문다. 그럼으로써 안식일의 눈은 대상의 겉이 아니라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의 도드라져 보이는 특이성[본질]을 깨닫는다. 안식일의 눈은 태초에 조물주가 세상을 보았을 법한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 눈에는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안식일의 눈은 색안경과 들보가 상징하는 고정관념과 감정을 벗겨낸 “깨끗한” 눈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에 홀려 대상 깊은 곳을 통찰하는 “그윽한” 눈이다. 참자아의 아름다운 실상을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알아차림이며 순수직관이다.
이러한 알아차림과 순수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이 향심기도다. 향심기도는 말 그대로 중심을 향하는 기도다. 중심에 참자아와 그 배후인 하나님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수행자의 주의를 끌어당겨 중심을 향한 응시(지향)를 방해한다. 이때 수행자는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생각을 알아차리던 수행자는 참자아(와 하나님)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생각에 대한 알아차림은 참자아(의 배후인 하나님)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변형된다. 이때 수행자는 하나님을 향한 최초의 지향 곧 순수직관의 상태를 회복하여 참자아를 무심히 응시한다. 이때가 색안경이 벗겨지는 때며, 들보를 빼내는 때다.
이러한 알아차림과 순수직관에서 중요한 것은 “판단중지”다. 향심기도 중에 수행자는 그 어떤 생각과 감정도 평가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속하고 추한 생각이라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흔들거나 물러가라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생각의 내용은 신경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대하는 태도다. 하나님을 향한 지향(응시) 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거의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알아차림 수행을 되풀이하다 보면 개념・이미지・감정이라는 들보는 점차 사라지고, 안식일의 순수한 눈으로 본질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참자아(의 배후인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리기” 시작한다. 당연히 너에게서도 “그것이 창조되던 날의 고요의 흔적”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너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이 보인다. 너는 더 이상 욕망의 도구도 아니고,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어떤 굴종도 강요할 수 없는 무한이다.(레비나스)
- 이민재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마 5:3,5)
“살수록 남편을 잘 모르겠어요.”
얼마 전 한 길벗에게서 들은 말인데, 나는 이렇게 맞장구쳤다.
“그래요, 오랫동안 같이 산 부부들도 서로를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나도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아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아마 대개는 나의 겉모습이 나인 줄 알 것이다. 가정에서 나는 부모님의 아들이고, 형제 가운데 하나이며, 아내의 남편, 아들의 아버지, 손주의 할아버지다. 교회에서 성도들은 강단에서 설교하는 나, 글을 통해서 만나는 나, 상담할 때 형성된 이미지를 나로 여길 것이다.
물론 관계에서 주어지는 이름이나 일과 관련된 이미지가 나의 전부는 아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면의 나, 욕심과 편견,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나, 인정받고 돋보이고 싶어 하는 나, 허영과 허위의식으로 들떠있는 나, 두려움이나 수치심, 좌절감을 느끼는 나는 모를 것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 너머에 있는 순수하고 고결한 나, 나를 가장 나답게 하는 나, 온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나는 더욱 모를 것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나는 세 차원이 겹쳐진 존재다. 첫째 차원은 가족과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나로 성경은 이를 “겉사람”이라고 부른다. 나의 사회적 자아라 할 수 있겠다. 둘째 차원은 겉사람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나로 토머스 머튼은 이를 “거짓자아”라고 불렀다.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에고라고도 한다. 셋째 차원은 겉사람과 거짓자아 너머에 있는 나로 이를 일컬어 “참자아”라고 한다. 나의 영적 자아다. 성경은 이것을 영, 속사람, 마음에 숨은 사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나에 대한 알아차림
나의 겉사람을 보는 사람들은 책임과 당위, 실적과 성적의 관점에서 나를 평가할 것이다. 내가 책임을 다하고 좋은 업적을 내면 멋진 남편 훌륭한 아빠 유능한 목사로 인정받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뿐일까, 어쩌다 나의 거짓자아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실망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욕심과 무의식의 충동, 불순과 불의, 허영과 교만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구제불능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며, 나는 좌절감과 수치심에 휩싸일 것이다. 이렇게 일부로 평가받는다면 슬플 것이다.
겉사람과 거짓자아뿐 아니라 참자아까지 볼 때 비로소 사람들은 나의 실상, 나의 전체를 보기 시작한다. 나의 참자아를 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자신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사람이라야 한다. 자신을 아는 만큼 남도 보이는 법이니까.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지 않는가. 가까이에 자기의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복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 겉사람의 초라한 성적이나 거짓자아의 위선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참자아는 새로운 관계의 지평을 열어준다. 평가하고 비교하던 관계는 용납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변형된다. 참자아의 깊고 너른 품, 그 품의 충만함과 넉넉함은 쓸모없다고 평가받은 겉사람도 받아들이고, 실망스럽다고 낙인찍힌 거짓자아도 용납한다. 관계의 기적이다. 이제 비로소 편견이나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에서 벗어나 사람을 본질로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참자아라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해서 사람들은 나를 볼 때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통해 만들어진 색안경을 끼고 본다. 그 색안경이 바로 선입견・편견・고정관념 같은 생각이며, 원망・미움・분노 같은 감정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마 7:3)는 이를 상징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들보를 빼내지 않고 나를 보면 나의 본질과 실상은 수많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파묻히고 만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좋아하면 좋은 것만, 싫어하면 싫은 것만 본다. 빨간 안경을 쓰면 모든 것들이 빨갛게 보이듯 나에게 있는 파란 것도 빨갛게 본다.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개념화”를 통해 조작된다. 이것은 나에 대한 폭력이다. 나의 본질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계에서는 이런 패턴이 작동한다. 직장에서는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 그렇다. 실적을 올리지 못한 직원은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하며, 상사의 괴물 같은 거짓자아에서 나오는 몰상식을 견뎌야 한다. 그게 바로 갑질이다. 회사에서 참자아로 존중받을 일은 거의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은 겉사람의 성적으로 평가될 뿐, 참자아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물론 교사도 마찬가지다. 교사든 학생이든 겉사람의 성적에 따른 평가가 일상화되면, 거짓자아의 마성적 힘에 사로잡히기 쉽다. 참자아가 활성화되지 않아 거짓자아의 무의식적 횡포를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의 모든 문제는 어쩌면 “참자아에 눈먼 겉사람의 절대화”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서 맺어지는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들 사이나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서도 똑같은 패턴이 작동한다. 참자아를 바탕으로 한 관계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모자식 관계나 부부관계, 심지어 연인 사이에서도 그런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대부분의 관계가 참자아를 배제한 채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통해 형성된 관념과 이미지를 통해 이뤄진다. 자신의 들보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겠다는 폭력은 이렇게 해서 시작된다.
너에 대한 알아차림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남을 보는 시선에도 해당한다. “나”가 세 차원이 겹쳐있는 존재인 것처럼 “너”도 그렇다. 너에게도 겉사람, 거짓자아, 참자아 세 차원이 있는 것이다. 설명을 간결하게 하기 위해 너의 세 차원을 너1, 너2, 너0라고 표시해보자. (나의 세 차원도 이렇게 표시할 수 있다. 나1, 나2, 나0) “너1”은 사회적 자아인 겉사람 차원을, “너2”는 자기중심적인 에고인 거짓자아 차원을, “너0”는 영적 자아인 참자아 차원을 표시한다. 세 번째 차원을 “너3”로 하지 않은 것은 참자아가 여러 차원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둘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들보가 상징하는 고정관념이 제로 상태 즉 무에 이르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너를 볼 때 나는 너1과 너2를 통해 만든 색안경을 쓰고 본다. 편견이나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으로 너의 껍데기를 볼 뿐, 너의 본질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나의 참자아(나0)를 알아차리지 않는 한, 너0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너”를 나의 고정관념에 가두고 너를 파편화한다.
너1이 기대에 못 미치면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냐고 힐난하며, 성적이 안 좋으면 누굴 닮아 그러냐며 조롱한다. 어쩌다 너2를 보기라도 하면 크게 실망하면서 위선자라느니 철면피라느니 하며 야비할 정도로 비난한다. 제 눈의 들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겠다며 횡포를 부린다.
나0를 각성하지 못한 나는 너0를 보지 못하면서 너를 슬프게 한다. 나0를 깨닫지 못한 나는 너0를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너를 수치심으로 물들인다. 나0에 무지한 나는 너0와 교감하지 못하면서 너에게 모욕감을 주고 상처를 입힌다. 나0에 눈먼 나는 너의 신성을 직관하지 못하며, 너0의 무한성을 감지하지 못한다.
너의 도구화가 시작된다. 너는 나의 욕망충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너는 내가 함부로 대하고 쓰다가 버려도 되는 물건일 뿐이다. 너는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도 소중한 존재도 아니다. 이렇게 나와 너는 타락한다.
나0의 깊고 너른 품과 그 품의 충만함과 넉넉함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너0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모르므로 너1의 부족함과 너2의 실망스러움을 품지 못한다. 용납하고 존중하는 관계는 꿈꾸지도 못하며, 나와 너는 비교와 평가의 굴레에 예속되고 만다. 관계는 시나브로 악연의 늪에 빠져든다.
남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남을 보는 시선에도 해당한다. “나”가 세 차원이 겹쳐있는 존재인 것처럼 “너”도 그렇다. 너에게도 겉사람, 거짓자아, 참자아 세 차원이 있는 것이다.
안식일의 눈
나의 깊은 곳(나0)까지 통찰하는 너의 시선은 불가능한 것일까? 너의 심연(너0)까지 들여다보는 나의 눈은 불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겉사람의 경력에 현혹되지 않고 거짓자아의 허영에 속지 않으면서 서로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자아의 깊고 넓은 품으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간단하다. 예수님 말씀대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제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면 된다. “색안경”을 벗으면 된다. 대상에 대한 개념화를 멈추고, 편견과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을 비우면 된다. 나와 너에 대해 겉사람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거짓자아가 만들어낸 허상을 벗겨내면 된다. 서로를 개념화하기 이전의 순수 자아, 서로에 대한 허상을 만들기 이전의 본질 형상을 알아차리면 된다. 사회적 지위나 학벌, 성적이나 실적으로 덧칠되기 이전의 순수 자아를 직관하는 눈을 뜨면 된다.
“안식일의 눈”이 이런 눈일 것이다.(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안식일의 눈이란 “대상에 자기를 온전히 내맡긴” 눈이며, “[대상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린 눈”이다. 그 눈은 “대상으로부터 그것이 창조되는 날의 고요의 흔적을 되살려낸다.” 따라서 그 눈은 개념화를 중지하고 대상이 창조되던 순간의 본질을 직관한다. 태초의 남자 사람이 여자 사람을 자기의 “뼈와 살”(참자아)로 파악한 것처럼 개념과 이미지를 덧붙이기 이전의 너를 본다. 편견과 고정관념, 호불호의 감정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 너를 본다.
또한 안식일의 눈은 “응시하는 대상 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거의 무시하는 듯한 시선”이다. 따라서 안식일의 눈은 모든 판단을 중지하고 대상 자체에 머문다. 그럼으로써 안식일의 눈은 대상의 겉이 아니라 “대상의 내부로 옮겨가” 그 대상의 도드라져 보이는 특이성[본질]을 깨닫는다. 안식일의 눈은 태초에 조물주가 세상을 보았을 법한 그런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 눈에는 모든 것이 보기에 “좋다.”
아도르노가 말하는 안식일의 눈은 색안경과 들보가 상징하는 고정관념과 감정을 벗겨낸 “깨끗한” 눈이다. 대상의 아름다움에 홀려 대상 깊은 곳을 통찰하는 “그윽한” 눈이다. 참자아의 아름다운 실상을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알아차림이며 순수직관이다.
이러한 알아차림과 순수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수행이 향심기도다. 향심기도는 말 그대로 중심을 향하는 기도다. 중심에 참자아와 그 배후인 하나님이 현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수행자의 주의를 끌어당겨 중심을 향한 응시(지향)를 방해한다. 이때 수행자는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간다. 생각을 알아차리던 수행자는 참자아(와 하나님)를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생각에 대한 알아차림은 참자아(의 배후인 하나님)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변형된다. 이때 수행자는 하나님을 향한 최초의 지향 곧 순수직관의 상태를 회복하여 참자아를 무심히 응시한다. 이때가 색안경이 벗겨지는 때며, 들보를 빼내는 때다.
이러한 알아차림과 순수직관에서 중요한 것은 “판단중지”다. 향심기도 중에 수행자는 그 어떤 생각과 감정도 평가하지 않는다. 아무리 저속하고 추한 생각이라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고개를 흔들거나 물러가라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생각의 내용은 신경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생각을 대하는 태도다. 하나님을 향한 지향(응시) 이외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거의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유지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알아차림 수행을 되풀이하다 보면 개념・이미지・감정이라는 들보는 점차 사라지고, 안식일의 순수한 눈으로 본질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참자아(의 배후인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에 홀리기” 시작한다. 당연히 너에게서도 “그것이 창조되던 날의 고요의 흔적”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너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이 보인다. 너는 더 이상 욕망의 도구도 아니고, 쓰다가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 어떤 굴종도 강요할 수 없는 무한이다.(레비나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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