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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그리스도인의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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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00회 작성일 23-03-1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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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옷장을 정리하다가 감색 베레모를 발견했다. 신학교 때 쓰던 것이다. 그런 걸 쓰고 쏘다니던 모습을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개성 있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실현하는 나만의 소품이었다. 사람들에겐 특별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다. “원 오브 뎀”이 아니라, “디 온리 원”이 되고 싶은 욕구 즉 개성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 말이다.

개성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튀는 옷을 입거나 과감한 노출도 꺼리지 않는 대담한 여자일까? 귀고리나 코걸이를 하고 손톱에 매니큐어까지 칠한 야리야리한 남자일까? 사회적 규범이나 통념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기행을 일삼는 예술가일까? 어떤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전문가일까? 군계일학(群鷄一鶴)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사람을 매혹하는 연예인일까?


경험 개성
개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경험” 개성과 “본질” 개성이 그것이다. 경험 개성은 말 그대로 성장과정 중에 여러 가지 삶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개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천적이기보다 후천적이며, 본질적이기보다 우연적(accidental)이며, 심층적이기보다 표층적이다. 그렇기에 경험 개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학창시절 의식깨나 있다는 여학생들은 화장도 안 하고 옷도 엉망으로 입고 다녔는데 그게 그들 나름의 개성이었다.

한 친구가 기억하는 신학교 시절 나의 모습 중에는 청바지 위에 양복 재킷을 입은 모습이 있다. 그 친구는 그 패션이 난해했다고 한다. 청바지 위에 티셔츠를 입든지 양복바지 위에 양복 재킷을 입는 게 정상이지 청바지와 양복 재킷의 조합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유학 가서 보니 수많은 젊은이가 그러고 다니는 것을 보고 나서 패션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 나는 입을 옷이 변변치 않아 청바지 위에 양복 재킷을 걸쳤을 뿐 최첨단 유행을 흉내 낸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 이미지는 친구에게 나의 개성으로 각인이 돼버렸다.

경험 개성의 바탕에는 타고난 성격이 있는 것 같다. 성격은 다양하다. 요즘 유행하는 MBTI에 따르면 열여섯 가지 유형이 있고, 애니어그램에 따르면 아홉 가지 유형이 있다. 성격 유형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욕구를 실현하는 방식도 다양하고, 그에 따라 구성되는 경험 세계도 다양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개성도 다양하다는 뜻이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어우러져 있는 꽃밭이 아름답듯이 개성은 다양해야 좋다. 하지만 “경험” 개성의 수명은 길지 않다. 모방과 유행을 통해 획일화하는 경향 때문이다.

경험 개성은 역설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개성을 추구하는 심리에는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들어있다. 하지만 인정을 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개성은 사라진다. 이것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다른 사람에 의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인에 의존하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닌 것처럼, 타자의 시선과 인정을 바라는 개성은 진정한 개성이 아니다.

개성은 왜곡되기도 한다. 개성을 빙자하여 자신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는 경우가 그렇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한다면,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개성을 표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심한 말로 상처를 준 사람에게 왜 그런 식으로 말하냐고 하면, “나 원래 말투가 그래!”라고 하거나, 약속시간에 번번이 늦는 연인에게 투정이라도 부리면, “나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거든!”이라고 하거나,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것으로 믿고 비밀을 털어놨는데 소문낸 사람에게 왜 그랬냐고 하면, “난 원래 솔직한 사람이야!”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사실 “원래-어법”은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릴 마음도 없고, 상대와 공감할 마음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원래-어법은 매우 이기적이다. 또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거나 자신의 모순된 언행을 합리화하기 때문에 매우 비겁하다. 무엇보다 원래-어법은 타자의 사정보다 자기 욕망을 우선시하므로 자기중심적이다. “원래 그런” 사람은 없다. “원래”를 남발하는 것은 왜곡된 개성의 무책임이며 폭력일 따름이다. 



예수님의 개성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을까? 목회자에 비유한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자신만의 향기를 갖고 개성 있게 목회하신 분이었다. 예수님의 개성이 돋보이는 것이 산상설교에 나오는 “나는 이렇게 말한다” 구문이다. 예수님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심으로써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상투적이며 인습적 사고방식을 전복시키셨다.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마 5:21-22)
 살인뿐 아니라, 간음에 대해서도, 이혼에 대해서도, 맹세에 대해서도, 보복에 대해서도, 이웃 사랑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같은 방식으로 당시의 율법적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예수님의 개성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며,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에서도 드러난다. 그런 예수님을 향해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묻기도 하였는데, 이 물음은 예수님이 남 같지 않음을, 즉 예수님의 개성을 반증하는 물음이기도 하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막 2:18) 같은 물음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물음에는 예수님의 개성에 대한 경이로움이 들어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곤 했다.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즉 개성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 1:22) 그래서 그분의 가르침은 신선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막 1:27) 그렇다고 예수님의 개성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개성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개성은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에 의존하는 개성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개성이었다.

예수님의 개성이 돋보이는 사건 중 하나가 안식일에 일어났다. 배고픈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었을 때 바라새파 사람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하고 비난하자, 예수님은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들만 먹게 되어있는 제단 빵을 먹은 일화를 꺼내면서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8)
예수님의 개성은 타인의 시선이나 인정에 의존하는 개성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개성이었다.

악마의 시험
묻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이천 년 동안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안식일 율법을 굶주린 제자들을 위해 폐기한 예수님의 용기 있는 개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곤고한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율법주의에 통쾌하게 한 방 날린 예수님의 전복적인 개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예수님의 개성이 경험 개성이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에 의존하는 개성 말이다.

그렇다면 타자의 시선과 무관한 예수님의 개성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떻게 생긴 것일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시니까, 하는 식으로,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서 대답을 찾지는 말자. 내 생각에 예수님의 용기 있는 전복적 개성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독보적인 개성은 광야에서 사십 일 금식 수행을 하는 동안 악마에게 시험받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사십 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허기진 예수님을 악마는 이렇게 유혹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눅 4:3) 예수님이 악마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셨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눅 4:4) 이 말과 함께 예수님은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차버리셨다. 생각해 보라. 돌을 빵으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대단한 마술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러는 순간 타자의 시선과 인정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것임을 예수님은 꿰뚫어 보셨던 것 같다. 타자를 의식하는 개성은 진정한 개성이 아니라는 개성의 패러독스를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악마는 끈질겼다. 자기에게 절하면 권세와 영광을 얻게 해주겠다며 유혹했고, 천사들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떠받쳐줄 것이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며 유혹했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 맘껏 개성을 펼쳐보라는 유혹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개성을 주저하지 않고 거절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실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예수님은 개성을 버림으로써 개성을 얻으셨다. 예수님은 욕망에 뿌리내린 경험 개성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개성의 영지로 돌파해(breakthrough) 들어가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렸기에(눅 4:1b) 가능한 일이었다. 예수님이 돌파해 들어간 새로운 개성의 영지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본질 개성”(essential individuality)이다.
예수님은 개성을 버림으로써 개성을 얻으셨다. 욕망에 뿌리내린 경험 개성을 포기함으로써 새로운 개성의 영지로 돌파해(breakthrough) 들어가셨다.
본질 개성
개성은 이미지를 형성한다. 개성 있는 사람은 그 사람 특유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러면 본질 개성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을까?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본질 개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타인의 인정에 의존하는 경험 개성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본질 개성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를 “나답게” 한다.

“나다움!” 본질 개성의 다른 이름이며, 이것이 참자아의 향기다. 이제 당신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마침내 당신은 “나다운” 춤을 춘다. 영과 혼과 몸이 사랑으로 떨며, 사랑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당신은 천진난만하고 유쾌해진다. 유머가 샘솟고, 억압됐던 호기심이 살아나 삶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본질 개성이 그리스도인의 개성이다.

안타깝게도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본질 개성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본질 개성은커녕 탐욕스러운 이미지, 배타적인 이미지, 뻔뻔한 이미지, 완고한 이미지, 고집불통 이미지, 수구적 이미지가 개성으로 굳어져 동시대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2014년에 이루어진 〈종교별 이미지 평가〉를 보자. 종교지도자의 자질을 묻는 문항에선 응답자의 43.9%가 천주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했고, 34.5%가 불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한 반면, 개신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23.8%만 우수하다고 대답했다. 교세확장을 묻는 문항에선 개신교(59.3%)가 천주교(22.9%)나 불교(23.7%)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지도자의 의식 수준이 낮고, 교세 확장에 관심이 많다는 이미지가 개신교의 개성으로 굳어진 것이다.

개신교인의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을 쫒느라 본질 개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의 통계에서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이기주의 집단 같고, 언행일치가 되지 않고, 헌금 강요가 심하고, 목회자의 사리사욕이 심하다고 묘사한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교회의 회복은 개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험 개성에서 벗어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질 개성을 구현하는 것 말이다. 하나님의 이미지(형상)에 뿌리내린 신성한 개성, “나다움”을 꽃피우는 참자아의 개성,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미소짓게 할 그리스도인의 향기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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