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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즐거운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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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0회 작성일 25-04-06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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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거름을 주겠습니다.

(눅 13:8)

   

 

로마 총독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희생제물에 섞은 일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으로 확일할 수는 없지만 1세 역사가 요세푸스가 어떤 유월절에는 3천 명의 유대인들이, 또 다른 유월절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에 실로암에 있는 탑(망대)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도 일어났던 것 같다. 이 사건도 역사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실로암에는 수로와 연못이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 탑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지진이나 부실 공사로 탑이 붕괴하는 사고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죄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사고방식은 유서가 깊다. 욥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친구들이 보인 태도가 그랬다. 엘리바스는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냐?”(욥 4:7)라고 대놓고 말했고, 빌닷은 “악한 자의 빛은 꺼지게 마련”(욥 18:5)이라면서 욥의 고난을 죄에 빗대 말했다. 소발은 “교만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머리가 구름에 닿는 것 같아도, 마침내 분토처럼 사라지고 말 것”(욥 20:6-7)이라면서 염장을 질렀다.



고난을 죄와 관련짓는 친구들의 사고방식에 욥은 격하게 저항한다. “친구라는 것들이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욥 6:15)라고 탄식하면서 이렇게 대든다. “너희 생각에는 내가 겪는 이 모든 고난도 내가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겠지.”(욥 19:5)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반박이기도 하다.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명기에 나타난 “축복과 저주”의 원리에 따라(신 28장),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믿었기에 갑작스러운 죽음 같은 불행을 죄에 심판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요 9:2)라고 물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국의 유명하다는 목사들도 그런 사고방식에 빠져있다. 이십여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대지진과 함께 발생한 쓰나미로 20만 명 넘게 죽었을 때도, 2011년에 동일본에서 일어난 유사한 사건으로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죽었을 때도,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로 많은 젊은이가 죽었을 때도 죄를 많이 지어서, 우상을 숭배해서, 음란해서 그렇다고 저주한 목사들이 있었다. 그들뿐일까. 죽음뿐 아니라 삶의 불행을 죄와 연결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이 죄를 지었다거나 더 큰 죄인인 것은 아니라고!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3, 5) 사고로 인한 죽음을 죄와 관련지어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준엄한 꾸짖음이다.







 

회개가 기쁘다고?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회개를 훨씬 강조한다. 회개라는 단어가 마태복음에 7번, 마가복음에 3번 나오고, 요한복음에는 아예 나오지 않는 것에 비해, 누가복음에 14번이나 나오는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는 회개에 관한 누가의 특수자료도 여럿 나온다. 오늘의 본문은 물론, 15장에 나오는 “되찾은 드라크마의 비유”나 잘 알려진 “탕자의 비유”가 그렇다. 누가는 이런 말도 한다. “이와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눅 15:7) 또는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눅 15:10)



누가는 왜 그렇게 회개를 강조한 것일까? 회개가 대체 뭐길래 하늘(하나님)이 기뻐하고 천사들이 기뻐한다는 것일까? 회개는 주로 양심의 가책, 죄책감, 후회, 반성, 우울, 슬픔, 통회, 자책, 자기 비난 등과 관련된다. 중세에는(13-14세기) 회개하기 위해 자기 맨살에 채찍질하는 “플라겔라치오”(flagelatio)를 공공연히 행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들이 이런 칙칙하고 침침한 회개를 기뻐할까? 예수께서 목숨 걸고 알려주신 “아빠 하나님”이 그런 사이코패스 같은 존재일까? 하나님의 천사들은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사디스트 같은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면, 대체 회개가 뭐길래 하나님과 천사들이 그토록 기뻐한다는 것일까?



예수님은 비유로 대답하신다. 어떤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세 해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 세 해는 산술적으로 3년이 아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충분히 오랜 세월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자, 포도원지기가 말했다. “주인님, 올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이 비유에서 돋보이는 사람은 포도원지기다. 그는 오랜 세월 열매를 맺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변호한다. 잘못은 무화과나무에 있는데 자기가 나서서 선처를 바란다. 주인이 그 요청을 듣고 “올해만” 삶을 연장해주었는지, 그 청을 거절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하지만 전후 문맥을 보면, 다시 말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마에 시달리던 여자에 대한 자비를 생각하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올해”를 선물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올해”는 유예 기간으로서 무화과나무에게는 은총의 기간이다. 이 은총의 기간은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를 생각나게 한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올해”라는 유예 기간을 선물 받은 무화과나무는 바로 이 은혜의 해를 선물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포도원지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무화과나무

포도원지기가 예수님이라면 무화과나무는 누굴까? 일차적으로는 유대인, 특히 위선적인 유대지도자들이었겠지만, 열매 없는 삶에 지친 모든 사람도 포함된다. 벗들에겐 이런 때가 없는가. 별일 없이 잘 살다가도 어느 날 문득 삶에(목회에도!) 열매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애쓴다고 애썼는데 업적도 변변치 못하고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럴 때면 허탈하고 쓸쓸하다. 이런 감정은 죄책감으로 발전한다. 4세기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가 말한 정념과 관련된 죄들이 앞다퉈 나를 고발한다. 탐식과 관련된 죄들, 음욕과 관련된 죄들, 탐욕과 관련된 죄들, 분노와 관련된 죄들, 우울과 관련된 죄들, 무기력과 관련된 죄들, 허영과 관련된 죄들, 질투와 관련된 죄들, 교만과 관련된 죄들이….



죄책감이 스멀거리기 시작하면 후회, 반성, 가책, 자책, 우울, 슬픔, 비통, 비난의 악순환이 시작된다. 마음은 무겁고 어둡다. 삶에는 우울과 침체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진다. 나름으로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해보지만, 삶의 기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런 게 포도원지기기인 예수님이 바라신 회개였을까?



이 비유에서 확실한 것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올해”라는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유예 기간은 전적으로 선물이다. 그렇기에 은혜의 시간이다. 포도원지기를 통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게 유예 기간이 주어졌다면, 똑같이 열매 없는 나에게도 “올해”라는 유예 기간이 곧 은혜의 해가 주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나의 “올해”는 은혜의 해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해라는 은혜의 해에 주님은 나에게 거름을 주겠다고 하셨다. 죄책감을 자라게 하는 거름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얼 자라게 하는 거름일까? 아, 그것은 나에게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자라게 하는 신령한 거름일 것이다! 올해는 은혜의 해 아닌가? 결국 주님의 신령한 거름은 진・선・미의 바탕인 참자아를 기르는 거름인 것이다!

 나의 “올해”는 은혜의 해인 것이다!

올해라는 은혜의 해에 내가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죄 중심의 사고에 빠져 은혜의 해를 후회, 반성, 가책, 자책, 죄책, 우울, 슬픔, 비통, 비난으로 물들이지 말고,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령한 거름으로 참자아를 튼실하게 기를 것! 죄에 물든 “나”에 매몰되지 말고, 죄의 먹구름 너머에서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매일 묵상할 것! 심리현실의 어둠 저편에서 빛나는 순수를 꿈꾸는 나, 진실을 갈망하는 나, 어린이처럼 깨끗한 나를 날마다 관조할 것!

올해라는 은혜의 해에 내가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죄 중심의 사고에 빠져 은혜의 해를 후회, 반성, 가책, 자책, 죄책, 우울, 슬픔, 비통, 비난으로 물들이지 말고,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신령한 거름으로 참자아를 튼실하게 기를 것!

 

은혜의 해는 지속된다

묵상할수록 처음에 희미했던 참자아의 빛이 더욱 밝아진다. 그러고 보니, 참자아의 순수한 빛은 나의 불결보다 강렬하다. 하나님 형상의 신성한 빛은 나의 저속(低俗)보다 고결하다. 보이기 시작한다. 나를 감싸고 일상을 둘러싼 찬란한 “은혜의 해”가! 마침내 나는 “은혜의 해”에 일어나리라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일들을 지금 여기에서 직접 경험한다. 저 벗어남과 눈뜸과 풀려남의 기적을! 죄 중심의 사고와 그 굴레에서 나는 해방된 것이다!



깨달음의 섬광이 번개 치듯 번쩍인다. 그렇구나, 회개는 죄에 집착하면서 후회와 가책 속에서 눈물 짓는 것이 아니라, “올해”를 은혜의 해로 받아들이는 것이구나!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거름으로 참자아를 튼실하게 기르는 것이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의 해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구나! 그게 진정한 회개구나! 회개는 그처럼 환하고 빛나는 일이구나! 그런 회개를 하나님과 천사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 없겠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런 즐거운 회개를 하지 않는다면 망하고 말겠구나!

그렇구나, 회개는 죄에 집착하면서 후회와 가책 속에서 눈물 짓는 것이 아니라, “올해”를 은혜의 해로 받아들이는 것이구나!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거름으로 참자아를 튼실하게 기르는 것이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의 해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이구나! 그게 진정한 회개구나! 회개는 그처럼 환하고 빛나는 일이구나!






은혜의 해인 올해에 참자아를 각성한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열매 없이 고생하던 생활현실로 돌아온다(성육신한다). 갑자기 삶과 목회 여정을 함께한 수많은 사람의 얼굴들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 대해 생각하는 길벗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입으로 나에 대해 말하는 지인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후배들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스도의 귀로 내 말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이 보인다.

자비롭게도 그 그리스도들이 나에게 “올해”라는 은혜의 해를 선물한다. 그들로 인해 나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 나의 입은 그리스도의 입처럼 진실해진다. 나의 눈은 그리스도의 눈처럼 너그러워진다. 나의 귀는 그리스도의 귀처럼 그윽해진다. 아, 얼마나 값진 열매인가! 수많은 그리스도들에 둘러싸인 나의 삶만큼, 그들로 인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나만큼 열매 푸짐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벗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가지 비밀이 남아 있다. “올해”는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것! 내년도 후년도 십 년 후도 “올해”이므로 은혜의 해는 끝나지 않는다. 포도원지기이신 예수님의 중재로 올해를 선물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신령한 거름으로 참자아를 튼실하게 기르는 숨빛인에게 은혜의 해는 계속된다. 아, 삶 자체가 은혜의 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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