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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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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4회 작성일 25-02-20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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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눅 6:21)”
 
 
 
 
지난 한 주 대한민국은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니, 경악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습니다. 하늘이라는 한 어린 생명이 자신을 가르치던 교사의 손에 무참히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하며 탄식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해자에 대해 분노했고, 소셜미디어에는 애도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많은 시민과 어린이들이 꽃과 메모, 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늘이를 추모했습니다.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유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울었습니다.

자기가 가르치던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심신 미약을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질까 염려하는 내 마음이 서둘러 중형을 선고합니다. 한편으론 걱정도 됩니다. 다른 교사들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전염될까 봐. 그래서는 안 됩니다.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손녀가 있어서 그런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미처 피어나지도 못하고 폭풍우의 심술에 떨어진 어린 꽃봉오리가 애잔하듯, 자신의 생을 미처 펼쳐보지도 못하고 가족의 품을 떠난 하늘이가 너무 안 됐습니다. 하늘이의 엄마와 아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얼마나 비통할까요. 얼마나 화가 치밀까요. 어떤 위로가 하늘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요. 하늘이가 얼마나 그리울까요. 하나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요. 남은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공교롭게도 성서일과 오늘의 복음은 이렇습니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이 말씀으로 어떻게 설교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하늘이네도 웃을 수 있을까요?






중병은 한순간에 생기지 않습니다. 한 개인의 생활 습관, 섭취하는 음식, 인간관계 방식, 유전적인 요인, 심리 상태가 오랜 기간 반복되고 뒤섞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발병합니다. 하늘이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은 가해자의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여러 요인이 뒤섞여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요인들을 심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통찰을 빌려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사회가 “죽음이 왕노릇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죄가 죽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다”(롬 5:21)고 합니다.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회는 결국 죄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인가요? 겉으로 드러난 잘못된 행동이기도 하지만 그 뿌리는 마음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란 심리현실의 바닥에 쌓여 있는 미움・증오・혐오・분노・우울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 편견・의심・고정관념・강박관념 같은 부정적인 생각의 덩어리, 이기심・고집・혈기・광기 같은 왜곡된 의지의 덩어리입니다. 한 마디로 심리현실의 부정성의 지배를 받을 때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회가 출현하지요. 이런 사회에서는 비통함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죽음이 왕노릇하는 사회를 생명이 왕노릇하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통곡하는 사회를 웃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까요? 그야, 심리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심리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나 영성현실의 긍정성에 뿌리내리면 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비우고 마음이 가난해져 무심에 이르면 됩니다. 이때 생활현실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고, 생명이 태양처럼 생활현실의 구석구석을 비출 것입니다. 마침내 사회 곳곳에서 웃음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간단하지만 이게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기초를 바꾸는 일이요, 축을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떨어지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다시 꼭대기로 올려놓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아닙니다. 나에게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힘이 잠들어 있고, 시체처럼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워야 하고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고 살려낼 자극이. 마중물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마중물은 펌프의 관을 채워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물입니다. 마중물이 끌어 올린 지하수가 사람을 살리고, 온갖 죽어가는 것들을 살려냅니다.

아니, 나에게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길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힘이 잠들어 있고, 시체처럼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워야 하고 살려내야 합니다. 그래서 자극이 필요하지요. 우리 안에 있는 생명력을 일깨우고 살려낼 자극이. 마중물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수의 강물”(요 7:38)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가 바로 마중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합니다. 마중물 예수를 영접하면 그것이 황폐한 심리현실의 구석구석을 적시면서 죽어가던 생명력을 살려냅니다. 존재의 심층에 있는 생명력을 활성화합니다. 땅속에서 끓던 마그마가 화산으로 폭발하듯이, 영성현실의 생명력이 분출합니다. 이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변화를 시편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시 30:11)

그래서 우리는 또 한 번 외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롬 5:17)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 16:31)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생수의 강물이요 영혼의 마중물인 예수 그리스도와 접속하여 영성현실에 잠재해 있는 참자아의 생명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일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것을 살려내는 실질적인 일이요, 그래야만 하는 절박한 과제입니다. 생명력이 흘러넘쳐야 죽음이 왕노릇 하는 삶을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으로 변형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지금 우는 사람들이 다시 웃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 또 다른 하늘이의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을 테니까요.

이제 남은 일은 예수님을 통해 살려낸 생명력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력이 흘러넘치게 하여 죽음이 왕노릇 하는 삶을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으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해있는 네트워크는 다양합니다. 선한 네트워크도 있고, 악한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사랑을 확장하는 네트워크도 있고, 혐오를 조장하는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행복을 전파하는 네트워크도 있고, 불행을 초래하는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네트워크가 존재하지만 크게 보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의 네트워크와 죽음의 네트워크가 그것이지요. 한 마디로 중보기도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에게 잠재해 있는 생명력을 확장하는 기도입니다.

한 마디로 중보기도는 생명의 네트워크를 통해 우리에게 잠재해 있는 생명력을 확장하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중보기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라는 네트워크 속에서 이뤄집니다. 이러한 생명의 네트워크 속에서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의 선의와 사랑을 접합니다. 그러면서 위로를 받고, 당면한 삶의 고통을 극복할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중보기도는 단순히 심리적 위안과 격려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은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의 신앙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생수의 강이요 영혼의 마중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의 네트워크 안에 참여합니다. 이때 죽음의 네트워크는 생명의 네트워크로 변합니다. 마침내 중보기도를 부탁한 사람과 중보기도를 해주는 사람은 생명으로 연대하며, 이때 비로소 죽음이 왕노릇 하던 삶은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으로 바뀝니다. 죽음 앞에서 울던 사람은 생명 앞에서 미소 짓기 시작합니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 조금씩 현실이 되기 시작하지요.

 




지난 수요일에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월요일 오후 대전에서 발생한 초등학생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제가 결혼 주례한 커플(제 절친 목사의 외아들)의 장녀 하늘이랍니다. 유가족(부모, 여동생, 조부모)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뉴스를 접하고 나도 안타까워하던 중이라 이렇게 답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하늘이가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엄마 아빠가 하늘이의 빈자리를 신성의 충만으로 극복할 수 있기를, 생의 어두운 터널을 잘 통과하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목사 말투였는데 이런 답이 이어졌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 참 많이 힘드네요. 제 손녀 같은 아이 하늘이와 유가족을, 기도 중에 생각나실 때마다 깊이깊이, 아주 깊이, 품어 안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깊이깊이 아주 깊이 품어 안아주시기를 부탁한다는 대목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아, 참 많이 힘드네요. 제 손녀 같은 아이 하늘이와 유가족을, 기도 중에 생각나실 때마다 깊이깊이, 아주 깊이, 품어 안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이 비극은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은명교회에서 우리와 함께 예배도 드렸고, 피정에서 영적 사귐을 깊이 나눈 길벗의 지인에게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요. 우리는 그 비극의 네트워크에 함께 속해 있었습니다. 죽음이 왕노릇 하는 현실은, 그 현실 속에서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아주 우리 가까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틀이 지나고 나서 그 길벗은 장례식 사진과 함께 하늘이를 그린 그림을 보냈습니다. 그 그림은 하늘이와 같은 학교 다니는 어린이가 그린 것이었는데,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늘아, 하늘에서는 마음 편히 놓고 맘껏 뛰어놀아. 고생했어!”

이 문장을 되뇌면서 나는 또 왈칵했습니다. 그 어린이는 그림에 이런 글도 적었습니다. “비록 못 그렸지만, 하늘이네 가족에게 이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요.” 이 어린이처럼 깊은 공감, 정중하고 품위 있는 조문, 따뜻하고 정성 깊은 위로를 하기도 쉽지 않지 싶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러잖아도 어제 하늘이 발인 뉴스를 보면서, 절규하는 할머니와 아빠, 유가족들을 보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비슷한 또래의 손녀가 있어서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는지요!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가해자에게 분노가 치밉니다. 보호해주지 못한 학교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왕노릇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 깊은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리스도를 평생 전하면 살아왔지만 생명이 왕노릇하는 사회를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하늘이의 명복을 빌면서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하지만 저의 기도가 ‘슬픔의 비통한 골짜기’를 지나는 유가족들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공교롭게도, 이번 주 성서일과 본문이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입니다. 비극과 비통의 심연에서 울부짖는 사람에게 이 말씀이 무슨 위로가 될는지요. 이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저의 언어와 말들이 너무 무력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습니다. 비극의 이면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성현실의 흐름이 있음을 믿으며, 그리고 그 흐름을 통해 하늘이네 가족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채 누리기도 전에 먼저 떠난 하늘이에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천상의 놀이와 기쁨이 풍성하고 또 풍성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하늘이의 빈자리를 슬픔과 원망, 분노와 절망, 자책과 그리움으로 채워야 할 아빠 엄마, 동생, 할머니 할아버지, 가족, 친지, 지인, 친구들에게 성령의 섬세한 위로와 도움이 함께 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는 학교 시스템이 확고하게 구축되고 생명이 왕노릇 하는 삶의 기후가 우리 사회에 조성되도록 성령의 바람이 휘몰아치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주례한 길벗님의 비통한 마음에도 새로운 삶의 용기가 깃들기를 기도할 따름입니다. 함께 울면서 연대합니다.”
 
오늘 아침 나는 이런 기도를 덧붙였습니다. “주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빈말이나 공허한 말이 아니게 하소서. 예수님, 당신은 진실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오니, 이 말이 헛소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늘이와 하늘이의 가족들에게,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왕노릇 하지 않게 하소서. 생명이 왕노릇 하게 하시어 웃는 일이 많이 일어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고전 15:57)라고 기도하면서 웃는 날이 속히 이르게 하소서. 제발!”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빈말이나 공허한 말이 아니게 하소서. 예수님, 당신은 진실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오니, 이 말이 헛소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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