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어느 날 문득, 성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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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71회 작성일 24-08-26 14:34본문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 6:51)
예수님은 자신을 빵에 빗대신다. 무슨 뜻일까. 빵은 둥글다. 원圓의 형태다. 융심리학에서 원(또는 구)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넘어, 심리적 전체성, 통합 그리고 균형을 나타낸다. 따라서 원은 완전한 자기Self를 상징한다. “원은 인간과 자연 전체와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정신의 전일성을 표현한다. 원은 자기 상징이다.”(『인간과 상징』, 270-271)
이로 미뤄볼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빵은 자기-원형archtype of Self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빵은 참자아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자신을 빵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참자아의 원형原形임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산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뜻이다. 참자아를 각성할 때 무의식과 의식의 모든 부분이 통합되어 “하나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나”가 되기 때문이다. 분열, 분리, 분산된 인격이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이 자기실현이다. 따라서 원 또는 빵은 자기실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전한 자기실현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에겐 후광이 나타난다. 후광은 참자아를 실현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존재의 빛남이다. 후광도 둥그렇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을 먹으면,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도 참자아를 각성하게 된다. 참자아를 각성하면 에너지 중심이 바뀐다. 욕망에서 참자아로 바뀐다. 참자아를 중심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된 요소들이 하나로 통합하여 전일적 존재로 변형된다. 바울 용어로 말하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된다.”(엡 4:13)
빵은 날마다 먹어야 한다. 우리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연합해야 한다. 그래야 참자아에 확실히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참자아가 완전한 삶의 에너지 센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자아로 삶의 모든 요소들─가족, 직업, 사회, 국가, 역사, 자연을 포함한 외적 요소들과 기억, 상상, 이성, 의지, 의식,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내적 요소들─을 하나로 꿰어 엮고, 삶의 구석구석을 참자아로 다스릴 힘이 생긴다.
등산화
지난주 토요일(8.10) 아침 일찍 뒷산에 올랐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교 준비의 부담 때문에 토요일 아침에 산을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주일 설교의 짐을 다른 길벗이 대신 져주었기에 가능했다. (그 길벗은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 가는 슬픔 속에서 설교의 짐을 대신 졌다. 고맙다.)
산 초입의 오솔길엔 장마철을 지나면서 풀이 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종아리에 닿는 풀과 이슬의 감촉이 선뜻하면서도 상쾌했다. 산자락에 남아 있는 열대야의 기운 때문인지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기분은 개운했다. 체내의 노폐물들이 땀과 함께 배출되면서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십 분 정도 올랐을까, 오른발에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뭔가를 밟은 것 같기도 했고 뭔가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오른발을 들어보았더니 등산화 밑창이 덜렁거렸다. 낭패였다. 그런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였다. 올라가야 하나 되돌아가야 하나. 그러다가 맨발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등산화를 벗어 길 곁에 놓아두었다. 양말도 벗어 등산화 속에 집어넣었다. 누가 가져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를 집어갈 사람은 없지 싶었다.
나는 맨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나 뾰족한 돌조각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다 보니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다. 걸음의 느림으로 인해 생긴 의식의 여백에 상념이 펼쳐졌다. 등산화를 버려야 하나, 강력 본드로 붙여 다시 신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한동안 지속됐다.
세월, 정화 경험
그러다가 등산화와 함께한 세월이 떠올랐다. 25년도 넘는 세월이었다. 나는 한때 새벽기도가 끝나면 그 등산화를 신고 매일 수락산에 올랐다. 월요일이면 도봉산에도 올랐고, 북한산에도 올랐고, 불암산에도 올랐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경기, 강원, 충청 일대의 여러 산에 오른 것도 그 등산화를 신고서였다. 설악산 대청봉이나 오대산 비로봉에 올랐던 것도, 지리산을 종주한 것도 지금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그 등산화를 신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등산화를 신고 올랐던 산들은 내게 성소였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보다 기도원보다 더 성스러운 곳이었다. 나는 기독교 영성에서 말하는 변형일치transforming union의 과정, 곧 의식이 상승하고 존재가 변형되면서 하나님과 합일하는 경험을 산에서 하곤 했다.
산은 “정화淨化, purification”의 성소다. 산을 오르면 땀이 흐른다. 땀과 함께 노폐물이 배출된다. 몸의 정화다. 이뿐 아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수선했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일하다 쌓인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관계에서 맺힌 감정도 풀어진다. 마음은 점차 무심에 이른다. 마음의 정화다.
산은 “조명照明, illumination”의 제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무심에 이른 마음에서 통찰과 영감이 쏟아진다.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위에서 오는 지혜”(약 3:17)가 나를 채운다. 성령의 빛 곧 “조명” 경험이다.
산을 오르는 나는 산을 오르기 전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된다. 산을 오르는 동안 욕망을 변형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망 에너지가 이타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변형된다. 억울함과 분노 에너지가 용납과 연민의 용기로 변형된다. 불평과 반항 에너지가 순명과 겸손의 힘으로 변형된다. 판단과 정죄의 칼날이 받아들임과 너그러움의 품으로 변형된다. 마음의 상처는 은총을 숨기고 있는 영혼의 보석으로 경험된다.
산을 오르는 나는 산을 오르기 전의 나와 다른 존재다. 산을 오르는 동안 욕망을 변형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망 에너지가 이타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변형된다.
이따금 만나는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 시원하게 마시면 피로가 싹 가시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에 얼굴을 씻거나 발이라도 담그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지친 몸에 생기가 돋는다.
산은 “합일合一, union”의 사원이다.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무심에 들었을 때 무아 상태에서 눈을 감으면 산의 침묵과 고요가 나를 감싼다. 산과 나는 하나가 된다. 내가 산인지, 산이 나인지 구분이 안 간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나 할까. 산과 하나된 나는 산에 두루 퍼지고 산과 이미 하나인 침묵 안에서 침묵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때가 변형일치를 경험하는 때다. 거짓자아는 자취를 감추고 참자아가 깨어나 빛을 발한다.
성사
이런 상념을 쫓다가 다시 등산화에 생각이 미쳤다.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아, 성사聖事네!
그래, 지금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는 나를 변형일치로 인도한 성사였다. 그 등산화를 신고 산에 오르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은 정화되곤 했다. 성령의 조명으로 신성한 통찰과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존재로 변형됐다. 산과 자연, 그리고 그 바탕이신 하나님과 합일하는 경험도 했다. 이러한 정화・조명・일치의 경험을 토대로 참자아를 각성했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형성된 사상을 설교로 옮겼다. 지금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나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도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 덕이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
“무심 예수”는 산에서 한 정화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고, 욕망이 변형되는 경험. 그럼으로써 모든 죄의 온상인 마음이 가난해지는 경험. 마침내 마음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경험. 그게 죄사함이다. 산은 내가 죄사함 받는 제단이었다.
죄사함을 받은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친다. 영감과 통찰이 샘솟고, 하늘의 지혜가 충만해진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나의 참자아도 얼굴을 내민다. 나는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이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나다워질 수도 없으며, 일상을 의미 있게 가꿀 수도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빵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먹어야 산다. 어떻게? 관상기도는 내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일상의 성찬 전례다. 하루도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나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말 그대로 구원이요, 생명이다. 예수는 마음의 장난에서 나를 구원하며, 참자아의 생명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 예수 덕에 나는 천국에 들어간다. 아니,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산다. 천국을 사는 마음에 찬송이 메아리친다.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모든 고백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가 이룬 일이다. 하지만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가 나에게 성사라고 해서 죽는 날까지 끼고 살 생각은 없다.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도 없다. 나에게 성사인 것이 남에게는 쓰레기일 테니 말이다. 남은 일은 성사와의 아름다운 이별이다. 방법은 궁리 중이다. 이별은 슬프지만 좋은 이별은 새로운 은총으로 이끌 것이다.
- 이민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요 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요 6:51)
예수님은 자신을 빵에 빗대신다. 무슨 뜻일까. 빵은 둥글다. 원圓의 형태다. 융심리학에서 원(또는 구)은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넘어, 심리적 전체성, 통합 그리고 균형을 나타낸다. 따라서 원은 완전한 자기Self를 상징한다. “원은 인간과 자연 전체와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정신의 전일성을 표현한다. 원은 자기 상징이다.”(『인간과 상징』, 270-271)
이로 미뤄볼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빵은 자기-원형archtype of Self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빵은 참자아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자신을 빵이라고 한 것은 자신이 참자아의 원형原形임을 스스로 밝히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또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산다.”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뜻이다. 참자아를 각성할 때 무의식과 의식의 모든 부분이 통합되어 “하나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나”가 되기 때문이다. 분열, 분리, 분산된 인격이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이 자기실현이다. 따라서 원 또는 빵은 자기실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완전한 자기실현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에겐 후광이 나타난다. 후광은 참자아를 실현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존재의 빛남이다. 후광도 둥그렇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을 먹으면,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도 참자아를 각성하게 된다. 참자아를 각성하면 에너지 중심이 바뀐다. 욕망에서 참자아로 바뀐다. 참자아를 중심으로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된 요소들이 하나로 통합하여 전일적 존재로 변형된다. 바울 용어로 말하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된다.”(엡 4:13)
빵은 날마다 먹어야 한다. 우리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연합해야 한다. 그래야 참자아에 확실히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참자아가 완전한 삶의 에너지 센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참자아로 삶의 모든 요소들─가족, 직업, 사회, 국가, 역사, 자연을 포함한 외적 요소들과 기억, 상상, 이성, 의지, 의식,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내적 요소들─을 하나로 꿰어 엮고, 삶의 구석구석을 참자아로 다스릴 힘이 생긴다.
등산화
지난주 토요일(8.10) 아침 일찍 뒷산에 올랐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설교 준비의 부담 때문에 토요일 아침에 산을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주일 설교의 짐을 다른 길벗이 대신 져주었기에 가능했다. (그 길벗은 동생이 먼저 하늘나라 가는 슬픔 속에서 설교의 짐을 대신 졌다. 고맙다.)
산 초입의 오솔길엔 장마철을 지나면서 풀이 길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종아리에 닿는 풀과 이슬의 감촉이 선뜻하면서도 상쾌했다. 산자락에 남아 있는 열대야의 기운 때문인지 얼마 오르지 않았는데도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기분은 개운했다. 체내의 노폐물들이 땀과 함께 배출되면서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십 분 정도 올랐을까, 오른발에 이상한 느낌이 있었다. 뭔가를 밟은 것 같기도 했고 뭔가가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오른발을 들어보았더니 등산화 밑창이 덜렁거렸다. 낭패였다. 그런 등산화를 신고 등산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잠시 망설였다. 올라가야 하나 되돌아가야 하나. 그러다가 맨발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등산화를 벗어 길 곁에 놓아두었다. 양말도 벗어 등산화 속에 집어넣었다. 누가 가져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스쳤으나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를 집어갈 사람은 없지 싶었다.
나는 맨발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나 뾰족한 돌조각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걷다 보니 평소보다 걸음이 느렸다. 걸음의 느림으로 인해 생긴 의식의 여백에 상념이 펼쳐졌다. 등산화를 버려야 하나, 강력 본드로 붙여 다시 신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한동안 지속됐다.
세월, 정화 경험
그러다가 등산화와 함께한 세월이 떠올랐다. 25년도 넘는 세월이었다. 나는 한때 새벽기도가 끝나면 그 등산화를 신고 매일 수락산에 올랐다. 월요일이면 도봉산에도 올랐고, 북한산에도 올랐고, 불암산에도 올랐다. 지금은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경기, 강원, 충청 일대의 여러 산에 오른 것도 그 등산화를 신고서였다. 설악산 대청봉이나 오대산 비로봉에 올랐던 것도, 지리산을 종주한 것도 지금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그 등산화를 신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등산화를 신고 올랐던 산들은 내게 성소였다. 유감스럽지만 교회보다 기도원보다 더 성스러운 곳이었다. 나는 기독교 영성에서 말하는 변형일치transforming union의 과정, 곧 의식이 상승하고 존재가 변형되면서 하나님과 합일하는 경험을 산에서 하곤 했다.
산은 “정화淨化, purification”의 성소다. 산을 오르면 땀이 흐른다. 땀과 함께 노폐물이 배출된다. 몸의 정화다. 이뿐 아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걷다 보면 어수선했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일하다 쌓인 스트레스도 사라지고, 관계에서 맺힌 감정도 풀어진다. 마음은 점차 무심에 이른다. 마음의 정화다.
산은 “조명照明, illumination”의 제단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무심에 이른 마음에서 통찰과 영감이 쏟아진다.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는 위에서 오는 지혜”(약 3:17)가 나를 채운다. 성령의 빛 곧 “조명” 경험이다.
산을 오르는 나는 산을 오르기 전의 나와 다른 존재가 된다. 산을 오르는 동안 욕망을 변형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망 에너지가 이타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변형된다. 억울함과 분노 에너지가 용납과 연민의 용기로 변형된다. 불평과 반항 에너지가 순명과 겸손의 힘으로 변형된다. 판단과 정죄의 칼날이 받아들임과 너그러움의 품으로 변형된다. 마음의 상처는 은총을 숨기고 있는 영혼의 보석으로 경험된다.
산을 오르는 나는 산을 오르기 전의 나와 다른 존재다. 산을 오르는 동안 욕망을 변형시키는 영혼의 연금술이 나도 모르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욕망 에너지가 이타적인 사랑의 능력으로 변형된다.
이따금 만나는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 시원하게 마시면 피로가 싹 가시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계곡물에 얼굴을 씻거나 발이라도 담그면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지친 몸에 생기가 돋는다.
산은 “합일合一, union”의 사원이다.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무심에 들었을 때 무아 상태에서 눈을 감으면 산의 침묵과 고요가 나를 감싼다. 산과 나는 하나가 된다. 내가 산인지, 산이 나인지 구분이 안 간다. 물아일체物我一體라고나 할까. 산과 하나된 나는 산에 두루 퍼지고 산과 이미 하나인 침묵 안에서 침묵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이때가 변형일치를 경험하는 때다. 거짓자아는 자취를 감추고 참자아가 깨어나 빛을 발한다.
성사
이런 상념을 쫓다가 다시 등산화에 생각이 미쳤다.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아, 성사聖事네!
그래, 지금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는 나를 변형일치로 인도한 성사였다. 그 등산화를 신고 산에 오르는 동안 내 몸과 마음은 정화되곤 했다. 성령의 조명으로 신성한 통찰과 영감을 얻었다. 새로운 존재로 변형됐다. 산과 자연, 그리고 그 바탕이신 하나님과 합일하는 경험도 했다. 이러한 정화・조명・일치의 경험을 토대로 참자아를 각성했다. 그리고 그 경험에서 형성된 사상을 설교로 옮겼다. 지금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오르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나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도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 덕이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
“무심 예수”는 산에서 한 정화 경험에서 비롯한 것이다. 몸이 정화되고, 마음이 정화되고, 욕망이 변형되는 경험. 그럼으로써 모든 죄의 온상인 마음이 가난해지는 경험. 마침내 마음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경험. 그게 죄사함이다. 산은 내가 죄사함 받는 제단이었다.
죄사함을 받은 마음에 성령의 빛이 비친다. 영감과 통찰이 샘솟고, 하늘의 지혜가 충만해진다. 그동안 감춰져 있던 나의 참자아도 얼굴을 내민다. 나는 하나님 형상의 완전한 실현이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다. 나다워질 수도 없으며, 일상을 의미 있게 가꿀 수도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빵이신 그리스도를 날마다 먹어야 산다. 어떻게? 관상기도는 내가 생명의 빵이신 그리스도를 먹는 일상의 성찬 전례다. 하루도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하여, 나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무심 예수 그리스도
참자아의 원형이시여
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에게 말 그대로 구원이요, 생명이다. 예수는 마음의 장난에서 나를 구원하며, 참자아의 생명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 예수 덕에 나는 천국에 들어간다. 아니,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산다. 천국을 사는 마음에 찬송이 메아리친다.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모든 고백은,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가 이룬 일이다. 하지만 밑창이 덜렁거리는 등산화가 나에게 성사라고 해서 죽는 날까지 끼고 살 생각은 없다.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도 없다. 나에게 성사인 것이 남에게는 쓰레기일 테니 말이다. 남은 일은 성사와의 아름다운 이별이다. 방법은 궁리 중이다. 이별은 슬프지만 좋은 이별은 새로운 은총으로 이끌 것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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