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묵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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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60회 작성일 23-03-22 21:43본문
침묵기도란 기도 중에 우리들의 사고, 기억, 상상과 같은 생각을 사용하여 드리는 묵상기도, 예수 기도나 크리스찬 묵상(Christian Meditation)처럼 마음속으로 단순하고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며 하느님께 마음을 올려 드리는 단순기도, 그리고 성령님 하느님의 내주하심과 활동하심에 대한 동의와 지향으로 드리는 향심기도를 총칭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이같은 명칭들과 구분으로 인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묵상과 관상을 단순하게 설명하라면, 묵상은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영혼의 눈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가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라고 한다면 관상기도는 생각이나 대화 너머 ’단순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 우리의 기도경험에서는 관상과 묵상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 양쪽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며 기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생활의 진보에 따라 기도 중에 관상적 차원이 보다 우세하게 되고, 묵상은 영적독서 과정에서 보다 자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관상의 두 차원 -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은 관상을 두 차원으로 나누어, 우리의 노력이 주를 이루는 차원과 하느님의 개입이 주를 이루는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여 왔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관상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려는 우리의 단순하고 사랑스런 노력이 우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없지만, 기도 중에 우리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상태를 체험합니다. 기도 중에 경험하는 이같은 관상적 체험은 영적여정에서 우리가 메마르고, 텅 빈 어두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기도 중에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계신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하여 줍니다. 또한 이같은 체험은 기도 중에 직면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차원의 관상을 ‘수득적 관상’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같은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시어 기도 중에 우리의 노력보다 하느님의 역할이 더 커지는 다음 상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두 번째 관상의 차원을 ‘주부적 관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활동이 기도 중에 더욱 우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깨어있으며 사랑스러운 임재에 젖어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단지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를 여는 일뿐입니다. 우리는 그 상태를 만들 수도 없고, 유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선물이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니, 오 주님,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 마음이 평안하지 않사옵니다.”
‘무지의 구름’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당신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느님의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묵상과 관상의 차이를 이렇게 글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실재로는 기도를 통하여 스스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어떤 특별한 체험에 대한 기대를 갖곤 하는데, 기도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단계의 체험을 하고 있는가보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여 드리는 묵상기도와 생각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머무는 관상 사이에는 다양한 영역의 기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과 함께 단순한 단어로 청원하는 기도가 한 예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절함을 담은 단순한 단어를 조용하고 평화롭게 반복적으로 말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단어면 족합니다. 가끔 우리가 드리는 단순한 기도문이나 단어를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기도문을 반복하는 일을 멈추고, 하느님 안에서 단순히 머물러 있고 싶은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는 하느님이나, 기도문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그저 하느님을 바라보거나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물게 됩니다. 단순기도는 이처럼 자주 우리가 순전한 침묵기도로 인도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단순한 기도를 되풀이하는 중에 생각이나 감정이 잠잠해 지고, 그저 하느님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중에 다시 어떤 분심이 떠오르면, 그 때는 다시 기도문을 반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도 중에 마음 깊이에서 단어나 소리로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만일 마음 깊이에서 침묵 가운데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침묵 가운데 머무십시오.
마음의 고요와 그리스도교 관상체험
관상전통은 그리스도교만의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관상적 차원이 있고, 더욱이 관상체험은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마라톤과 같은 운동이나 등산을 하는 중에, 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순간에도 관상을 경험할 수 있고, 힌두교의 그루(영적 스승)들은 수련을 위해 때로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요사이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기(氣수)련 같은 유사종교의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같은 수련의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유사종교의 수련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에 오래 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 온 정신과 의사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인 제럴드 메이(Gerald May)는 관상체험과 관상기도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상과 관상기도 사이의 차이점은 중요합니다. 심리적 상태로서 관상은 대개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가르쳐지고, 배우고, 개발할 수 있습니다. 한번 관상적 상태를 이루면, 관상적 상태는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도 있습니다. 위대한 운동가들과 예술가들은 최고의 상태일 때 종종 관상적 상태가 됩니다. 또한 관상은 고대 일본의 암살자인 닌자들을 위한 훈련에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열망으로 관상 훈련을 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목적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듭니다. 오늘날 많은 훈련과 현상들에 단순히 ‘영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식의 비상한 수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그 세계의 정의에 따라 영적이 될 수도 있지만, 확실히 그것들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과 신성(神性)을 위한 의식적인 열망의 필수 불가결한 기초는 아닙니다.”
- 사랑의 빛을 견디기 中에서 -
제럴드 메이의 견해에 기초하여 간단히 답하자면 수련이 단지 개인의 내적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긴장이완 훈련에 가깝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수련 속에서 하느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수련 중에 있는 그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언제나 은총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한국 샬렘에서 출판한 ‘그리스도교 마음챙김 Christian Mindfulness’의 저자 피터 타일러Peter Tyler는 요사이 현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마음챙김 Mindfulness’과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을 비교하면서 인지적 차원의 명상에 가까운 기존의 Mindfulness에 비하여 그리스도교 관상기도는 인격적 관계에서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Heartfulness에 가깝다며 그 차이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관상기도는 초월자이신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드려지는 기도인 동시에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아빌라의 데레사 저술을 인용하며, 하느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직 두 가지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기도의 여정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중요한 세 가지 태도로, 겸손과 초탈 그리고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그의 책 ‘가르멜의 산길’에서 기도 중에 우리가 체험하는 고요의 상태, 이미지나 감정, 갈망 등이 사라진 상태를 언급하면서, 영혼이 그곳에 이르면 분리감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느님 임재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기적 경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에 의해 반응하도록 고무된다고 하였습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기도에 대한 이같은 명칭들과 구분으로 인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묵상기도와 관상기도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묵상과 관상을 단순하게 설명하라면, 묵상은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라면, 관상은 ‘영혼의 눈으로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가 ’하느님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기도‘라고 한다면 관상기도는 생각이나 대화 너머 ’단순한 사랑으로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재 우리의 기도경험에서는 관상과 묵상의 경계가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 양쪽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며 기도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생활의 진보에 따라 기도 중에 관상적 차원이 보다 우세하게 되고, 묵상은 영적독서 과정에서 보다 자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관상의 두 차원 -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은 관상을 두 차원으로 나누어, 우리의 노력이 주를 이루는 차원과 하느님의 개입이 주를 이루는 차원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여 왔습니다. 첫 번째 단계의 관상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주의를 기울이려는 우리의 단순하고 사랑스런 노력이 우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활동을 우리가 직접 느낄 수 없지만, 기도 중에 우리는 평화롭고 감미로운 상태를 체험합니다. 기도 중에 경험하는 이같은 관상적 체험은 영적여정에서 우리가 메마르고, 텅 빈 어두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도 기도 중에 우리 안에서 일하시고 계신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선물하여 줍니다. 또한 이같은 체험은 기도 중에 직면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이런 차원의 관상을 ‘수득적 관상’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같은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시어 기도 중에 우리의 노력보다 하느님의 역할이 더 커지는 다음 상태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두 번째 관상의 차원을 ‘주부적 관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활동이 기도 중에 더욱 우세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깨어있으며 사랑스러운 임재에 젖어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단지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를 여는 일뿐입니다. 우리는 그 상태를 만들 수도 없고, 유지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한 선물이며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으니, 오 주님,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 마음이 평안하지 않사옵니다.”
‘무지의 구름’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당신의 존재입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당신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느님의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묵상과 관상의 차이를 이렇게 글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실재로는 기도를 통하여 스스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도 중에 어떤 특별한 체험에 대한 기대를 갖곤 하는데, 기도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단계의 체험을 하고 있는가보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점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여 드리는 묵상기도와 생각이 고요해진 상태에서 머무는 관상 사이에는 다양한 영역의 기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갈망과 함께 단순한 단어로 청원하는 기도가 한 예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간절함을 담은 단순한 단어를 조용하고 평화롭게 반복적으로 말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우리 마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몇 단어면 족합니다. 가끔 우리가 드리는 단순한 기도문이나 단어를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기도문을 반복하는 일을 멈추고, 하느님 안에서 단순히 머물러 있고 싶은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는 하느님이나, 기도문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그저 하느님을 바라보거나 하느님 안에 고요히 머물게 됩니다. 단순기도는 이처럼 자주 우리가 순전한 침묵기도로 인도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단순한 기도를 되풀이하는 중에 생각이나 감정이 잠잠해 지고, 그저 하느님을 고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중에 다시 어떤 분심이 떠오르면, 그 때는 다시 기도문을 반복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기도 중에 마음 깊이에서 단어나 소리로 기도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만일 마음 깊이에서 침묵 가운데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침묵 가운데 머무십시오.
마음의 고요와 그리스도교 관상체험
관상전통은 그리스도교만의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관상적 차원이 있고, 더욱이 관상체험은 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마라톤과 같은 운동이나 등산을 하는 중에, 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순간에도 관상을 경험할 수 있고, 힌두교의 그루(영적 스승)들은 수련을 위해 때로 약물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더욱이 요사이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기(氣수)련 같은 유사종교의 수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같은 수련의 경험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유사종교의 수련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련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에 오래 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 온 정신과 의사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인 제럴드 메이(Gerald May)는 관상체험과 관상기도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관상과 관상기도 사이의 차이점은 중요합니다. 심리적 상태로서 관상은 대개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가르쳐지고, 배우고, 개발할 수 있습니다. 한번 관상적 상태를 이루면, 관상적 상태는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될 수 도 있습니다. 위대한 운동가들과 예술가들은 최고의 상태일 때 종종 관상적 상태가 됩니다. 또한 관상은 고대 일본의 암살자인 닌자들을 위한 훈련에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한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열망으로 관상 훈련을 할 수도 있고, 또는 다른 목적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듭니다. 오늘날 많은 훈련과 현상들에 단순히 ‘영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인식의 비상한 수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그 세계의 정의에 따라 영적이 될 수도 있지만, 확실히 그것들은 기도는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느님과 신성(神性)을 위한 의식적인 열망의 필수 불가결한 기초는 아닙니다.”
- 사랑의 빛을 견디기 中에서 -
제럴드 메이의 견해에 기초하여 간단히 답하자면 수련이 단지 개인의 내적 마음의 평안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기도라기보다 긴장이완 훈련에 가깝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수련 속에서 하느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수련 중에 있는 그에게 믿음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언제나 은총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해 한국 샬렘에서 출판한 ‘그리스도교 마음챙김 Christian Mindfulness’의 저자 피터 타일러Peter Tyler는 요사이 현대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마음챙김 Mindfulness’과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을 비교하면서 인지적 차원의 명상에 가까운 기존의 Mindfulness에 비하여 그리스도교 관상기도는 인격적 관계에서 가슴으로 드리는 기도- Heartfulness에 가깝다며 그 차이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관상기도는 초월자이신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드려지는 기도인 동시에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아빌라의 데레사 저술을 인용하며, 하느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오직 두 가지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기도의 여정을 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중요한 세 가지 태도로, 겸손과 초탈 그리고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역시 그의 책 ‘가르멜의 산길’에서 기도 중에 우리가 체험하는 고요의 상태, 이미지나 감정, 갈망 등이 사라진 상태를 언급하면서, 영혼이 그곳에 이르면 분리감은 사라지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내가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느님 임재 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기적 경향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영에 의해 반응하도록 고무된다고 하였습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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