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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행복의 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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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50회 작성일 23-03-1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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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
(누가 1:45)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누가 1:48)
 

두 여자가 만났다. 앳돼 보이는 여자 마리아와 늙수그레한 여자 엘리사벳이 만났다. 나이 차이가 컸지만 둘은 모두 임신하고 있었다. 둘 다 불가능한 임신이었다. 마리아는 결혼 전이었고 엘리사벳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성령으로,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자비로 임신할 수 있었다. 두 여자의 만남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감으로써 이뤄졌다. 마리아가 문안 인사를 했을 때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그대의 인사말이 내 귀에 들어왔을 때에 내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줄 믿은 여자는 행복합니다.”(눅 1:43-45)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아기를 잉태하고 있는 소녀를 “내 주님의 어머니”(테오토코스, Θεοτόκος)라 칭하면서 최고의 존중을 표한다. 요한 아가는 예수 아가를 알아보고 기뻐서 뛰논다. 늙은 여자 엘리사벳은 “주님의 일에 순명한” 젊은 여자 마리아가 행복하다고 확언한다.




탄생의 문
누가가 전하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에게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Sagrada Família)의 “탄생의 문”이 떠오른다. 처음 그 문을 보았을 때 나는 경탄했다. 유럽의 고딕식 종교건축물들에서 볼 수 있는 획일적인 장엄미가 아니라 유희(遊戱)의 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탄생의 문은 녹색과 붉은색의 아이비잎으로 뒤덮여 있다. 그런데 주의 깊게 살펴보면 도롱뇽이나 도마뱀은 물론, 파리나 무당벌레, 딱정벌레나 거미 같은 곤충들이 숨어 있다. 가우디는 경건한 문양이나 종교적 상징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파충류나 곤충들을 성당문에 새겨 넣었던 것이다. (내 손주도 거미를 무척 좋아한다. “거미 보러 갈까?” 하면 울다가도 울음을 뚝 그친다. 아파트 베란다 구석에서 거미줄을 치고 살아가는 거미를 바라보며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다.)

나는 가우디가 어린이같이 장난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정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가의 모습으로 강생하셨다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에 담겨 있는 유머 코드를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 어떻게 탄생의 문에 그런 장난을 칠 수 있겠는가.




“탄생의 문” 앞에 서서 가우디가 새겨 넣은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유머와 장난의 코드를 음미할 때 나는 행복했다. 그러다가 슬픔이 밀려왔다.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들어 있는 신성한 유머와 해학에 무지한 한국교회의 욕심 사납고 독선적인 경건과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탄생의 문” 앞에 서서 가우디가 새겨 넣은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유머와 장난의 코드를 음미할 때 나는 행복했다. 그러다가 슬픔이 밀려왔다.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들어 있는 신성한 유머와 해학에 무지한 한국교회의 욕심 사납고 독선적인 경건과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묵상할 때 왜 “탄생의 문”이 생각났을까? 아마 복음서의 이야기와 탄생의 문에서 풍기는 감정선이 비슷하기 때문인 것 같다. 즐겁고 행복한 분위기 말이다.

사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아 가임기를 벗어났고, 마리아는 혼례를 치르지 않은 처녀였기에 임신할 수 없었다. 두 여자의 임신은 생물학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마리아의 경우는 훨씬 더 그렇다. 엘리사벳은 늙은 남편이라도 있었지만, 마리아는 처녀의 몸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민망할 법도 하고 쉬쉬할 만도 한 임신을 한 두 여자는 만남을 즐거워했다. 요한 아가는 예수 아가를 알아보고 기뻐서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더러 행복한 여자라고 확언까지 해주었다. 이것이 예수 탄생 직전의 분위기이다. 그래서 가우디는 “탄생의 문”을 어린아이들이 즐거워하는 소재로 장식한 게 아닐까.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즐거움 또는 유희의 정신 아닐까.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 정서요, 기독교인의 삶의 정서적 배음(背音)인 까닭이다.



 
마니피캇
이런 즐거움을 마리아는 노래로 표현한다. “마니피캇 아니마 메아 도미눔!”(Magnificat Anima Mea Dominum, 눅 1:46)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노래는 이어진다.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좋아한다”의 그리스어 “에갈리아센”(ēgalliasen, ἠγαλλίασεν)은 “크게 기뻐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리아의 기쁨은 단순히 감정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눅 1:51-52)
마리아가 노래하는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신다. 그 대신 비천한 사람을 높이신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제왕 편이 아니다.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 편이다. 그래서 오만한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요즘 깨어있는 개신교를 포함한 주요 종교들이 제왕적 권력의 오만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일상과 정치의 영역에서 종교가 발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이 비상하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행정부의 고위직 인사들과 입법부의 국회의원들과 사법부의 법관들은 예언자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배후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중세 말 기독교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고,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셨다. 개혁자들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개신교라고 봐주실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종교개혁 5백 년이 지난 요즘, 개신교 시대(Protestant Era)가 끝나가고 있는 조짐이 농후하다.




내면의 제왕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권력자들만 내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내면에 있는 제왕도 끌어내신다. 내면의 제왕? “거짓자아” 말이다. 거짓자아처럼 교만한 것도 없다. 거짓자아처럼 군림하고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없다. 거짓자아처럼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되려는 자기중심적인 권력자도 없다. 거짓자아는 법을 이용해 불법을 자행하고, 진실의 가면을 쓰고 거짓말을 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그래서 거짓자아는 하나님과 상극이다. 하나님은 거짓자아의 합법을 가장한 불의과 진실의 가면을 쓴 위선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이다. 거짓자아는 참자아도 싫어한다. 참자아의 배후는 하나님이시니 말이다.

참자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마음과 뜻을 다한다면 거짓자아는 그 사랑을 방해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거짓자아는 참자아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한다. 거짓자아는 참자아를 감시하며,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한다.

타고르는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밀회”를 방해하는 거짓자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홀로 밖으로 나와 밀회를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내 뒤를 따라오는 자, 그는 누구인가요?
그의 존재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켜서지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흙먼지를 일으킵니다. 그는 내가 하는 모든 말에 자신의 큰 목소리를 덧붙입니다.
나의 님이여, 그는 바로 나의 작은 자아입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와 함께 당신의 문 앞에 다가가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기탄잘리』, 30)
 시인이 “나의 작은 자아”라고 표현한 거짓자아는 어둠 속에서 참자아의 뒤를 밟는다. 그의 존재를 피해보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다. 그는 나 곧 참자아를 지배하려고 한다. 수줍게 삶의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의 큰 목소리를” 덧붙이면서 훼방의 흙먼지를 일으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당하며 부끄러움을 모른다.


제왕의 집착
거짓자아는 세 가지 집착으로 하나님 사랑을 방해한다. 예수님은 광야시험을 통해 그 셋을 몸소 겪으셨다. 첫째는 빵 곧 물질에 대한 집착이다. 참자아는 하나님 안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부와 충만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거짓자아는 집요하게 유혹하면서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게 한다. 타고르의 『기탄잘리』가 묘사하듯 말이다.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부가 당신 안에 있음을 나는 믿습니다. …하지만 내 방을 가득 채운 반짝이 장식들을 내다버릴 용기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나를 감싼 이 [화려한] 옷은 먼지와 죽음의 수의. 나는 그 옷을 증오하면서도 여전히 사랑으로 껴안습니다.
 두 번째는 명예 곧 이름에 대한 집착이다. 참자아는 명함이나 이력서에 적혀 있는 수많은 이름에 갇혀 있다. 그 이름들은 참자아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다. 그 감옥에서 세속의 이름들이 각광 받을 때 참자아라는 신성의 아이는 소외의 눈물을 흘린다.
내 이름 안에 가둔 그가 지하 감옥에서 눈물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주위에 벽을 쌓아 올리느라 언제나 분주합니다. 벽이 하늘을 향해 나날이 높아질수록 나는 그 어두운 그늘에 가린 나의 참자아를 보지 못합니다. (『기탄잘리』, 29)


 
하나님과 사랑의 밀회를 방해하는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집착이다.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면 자유로워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권력을 가질수록 권력에 예속된다.
나는 누구도 꺾지 못할 권력을 가지면 세상을 지배해 나 자신의 자유를 방해받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낮없이 거대한 불길로 쇠를 달구고 무자비한 망치질로 두드려 사슬을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슬의 고리가 완성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것은 나 자신임을. (『기탄잘리』, 31)
 대림절, 물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비대해진 교만한 내부 권력자, 거짓자아라는 내면의 황제를 왕좌에서 끌어내려야 하는 때다. 예수 아가의 탄생을 기다리며, 비천하게 취급받던 참자아를 새롭게 탄생시켜야 하는 때, 굶주린 참자아가 하늘 양식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도록 수행에 정진해야 하는 때다.

나와 너, 우리 안에서 참자아라는 아기가 살아나, 서로 문안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내 안에 있는 요한 아가가 당신 안에 있는 예수 아가를 알아보면서 기쁘게 뛰노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장담하는데 행복의 비법으로 이만한 건 없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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