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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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73회 작성일 23-03-14 14:25본문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출 33:23)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감리교신학대학 옥탑방에서는 목요일 저녁마다 관상기도 모임이 열린다. 교수님 몇 분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참석하고 있다. 이 기도회는 관상적 영성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모임은 찬양, 관상기도(향심기도), 거룩한독서, 나눔, 기도 순서로 진행된다.
옥탑방의 기도
지난 목요일 성서일과는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포한 설교였다.(행 17:22-34)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구절들이다.
묵상을 나눈 다음엔 묵상을 토대로 기도를 하는데 그날 참석한 네 명의 학생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을 때마다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하나님과 싸우겠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주님, 순종할 힘을 제게 주소서.”
“모든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알아차리게 해주소서.”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는 학생은 감사와 찬양을 바쳤고,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학생은 실존의 고뇌와 신앙의 고민을 바쳤다. (두 번째 학생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도발이었다.) 순종할 힘을 달라는 학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간절함을 바쳤고, 모든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알아차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학생은 하나님을 더욱 넓고 깊게 경험하고 싶은 갈망을 바쳤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든,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도발이었든, 순종에 대한 간절함이었든, 하나님 경험에 대한 갈망이었든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 속에 임재하셨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들의 기도는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그들의 기도를 “더듬고” 있었다. 문득 그날 본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행 17:27)
더듬음의 행복
잠은 달아났고, 새로운 묵상이 시작됐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주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다. 그렇기에 시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시 17:2)고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굴을 직접 보여주시지는 않아도 등은 보여주신다. 얼굴을 보이시되 “간접적으로” 보여주신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눈으로 밝히 볼 수 있는 대낮에는 더듬어 찾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두우면 더듬어 찾아야 한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니까.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하나님이 그런 존재다. 하나님 앞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지성은 눈이 먼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시각장애인은 목표를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면 흰 지팡이로 가장 가까운 지점을 두드리며 발을 떼야 한다. 좌우를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목표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따라서 더듬는다는 것은 가까운 지점부터 확인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더듬으려면 공간적으로 가까워야 할 뿐 아니라 사이도 가까워야 한다. 더듬음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허용된 육감적 행복이다. 사이가 나쁘면 더듬을 수 없다. 낯선 사람을 더듬었다가는 큰일 난다. 더듬음은 육감적 침입을 허용받은 사람이 누리는 황홀한 축복이다. 결국 더듬는다는 것은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사랑의 몸짓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묵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은 그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학생들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셨음을!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궁극의 존재도 신학적인 추상의 존재도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처럼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하니, 벗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라. 그들의 생애를 더듬어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듬어라. 그 속에 들어있는 눈물을, 고뇌를, 불안을, 좌절을, 그리고 기도를 더듬어라.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천의 얼굴로 다가오신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형상이다.”(게오르규) 하나님을 만나려고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사막을, 산속을, 오지를 배회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을 통해 현존하시니까.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낯선 사람들한테는 예의 발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례할 때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형상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폭언을 퍼붓거나 폭행을 하면서 상처를 입힐 때도 있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성사(聖事)인데도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깝다고 막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다. 친하다고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등을 보여주신다. 허물없다고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신비를 보여주신다. 하여 가까울수록, 친할수록, 허물없을수록 하나님의 성사로 모실 줄 알아야 한다. 사도 요한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사도 바울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라.
그들의 생애를 더듬어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듬어라. 그 속에 들어있는 눈물을, 고뇌를, 불안을, 좌절을, 그리고 기도를 더듬어라.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천의 얼굴로 다가오신다.
기도에 대한 예의
간밤에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지난 학기에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 보낸 것이었다. 강의를 통해 기도의 길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향심기도를 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 보냈다. 그는 향심기도를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으로 묘사했다. 표현이 재미있었고 그럴듯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려고” 향심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깊은 침묵 속에서 생각들이 쏟아지고, 사역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이런 경험은 향심기도 중에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향심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안다. 생각들과 싸우지 않고,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된다. 아무리 멋진 통찰과 영감이 떠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현존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 마음은 다시 고요해진다.
그 학생도 지침에 따라 생각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서 향심(向心)을 계속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붙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만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그것은 마치 제가 교수님과 만나 차 한 잔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중에 제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예의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기도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기도가 지향하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수행을 통해 향심기도의 핵심을 깨달은 것 같았다. 향심기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아무리 훌륭한 영감과 통찰,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흘려보내라는 말을 계속 듣는다. 향심기도는 영감과 통찰을 얻기보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무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비움의 근육”(muscle of letting go)이 발달한다.
아무튼 나는 “기도에 대한 예의”라는 표현을 읽었을 때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하려는 그의 단정하고 경건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도 느껴졌다. 그러자 나도 경건해졌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까운 사람을 통해 구름과 어둠 속에 감춰진 얼굴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경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자존심 죽여가며 감당하는 일상의 수행자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직업의 귀천을 마다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하는 홀어미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개인의 일을 챙기기보다 하나님의 일에 평생 헌신한 가난한 성도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사랑과 정의에 헌신하다 병약해진 노년의 운동가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자신도 가난하면서 더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나눠주는 수도자 같은 신학도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빚더미 교회를 살려보겠다고 은퇴 가깝도록 고군분투하는 친구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에게서, 평생 하나님의 뜻을 받든 겸손한 목회자에게서, 청빈한 영혼으로 내 기름진 양심에 일갈하는 고난의 종들에게서 나는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만난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한 지향을 갖고, 그 지향을 포기하지 않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들을 무너지지 않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혹여 그들이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저주 같은 운명조차 감내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 사회가 버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 분,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시하신 분,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려고 목숨을 바치신 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분, 저주 같은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이신 분,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분!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여, 그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의 혈관에는 하나님의 피가 흘렀다. 그분의 전존재는 하나님으로 물들었고, 마침내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그분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뚜렷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육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본다. 그분을 바라보며 하나님스러워진다.
비르질 게오르규는 평생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온 아버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평생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내 아버지의 형상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위대한 화가들의 명화도, 감탄을 자아내는 경치도, 아름다운 여성의 빛나는 미모도,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도 내 아버지의 얼굴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버지는 하나의 이콘이었다.”(게오르규, 『25시에서 영원으로』)
경박한 물음 하나. 사람들은 나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을까? 나의 지향과 좌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등을 터럭만큼이라도 보고 있을까? 나의 넘어짐과 일어섬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비를 흘낏이라도 본 적 있을까?
아무려나 하나님은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는 바울의 말을 흉내내어 말해본다면, “하나님은 만인이시며 만인 안에 계신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수시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가을이다.
- 이민재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출 33:23)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감리교신학대학 옥탑방에서는 목요일 저녁마다 관상기도 모임이 열린다. 교수님 몇 분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이 참석하고 있다. 이 기도회는 관상적 영성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모임은 찬양, 관상기도(향심기도), 거룩한독서, 나눔, 기도 순서로 진행된다.
옥탑방의 기도
지난 목요일 성서일과는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선포한 설교였다.(행 17:22-34)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구절들이다.
묵상을 나눈 다음엔 묵상을 토대로 기도를 하는데 그날 참석한 네 명의 학생들은 이런 기도를 드렸다.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을 때마다 하나님을 느끼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하나님과 싸우겠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신 주님, 순종할 힘을 제게 주소서.”
“모든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알아차리게 해주소서.”
기도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는 학생은 감사와 찬양을 바쳤고,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학생은 실존의 고뇌와 신앙의 고민을 바쳤다. (두 번째 학생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도발이었다.) 순종할 힘을 달라는 학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간절함을 바쳤고, 모든 것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알아차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학생은 하나님을 더욱 넓고 깊게 경험하고 싶은 갈망을 바쳤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든, 하나님과 싸우겠다는 도발이었든, 순종에 대한 간절함이었든, 하나님 경험에 대한 갈망이었든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 속에 임재하셨다. 그날 일과를 마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들의 기도는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나는 그들의 기도를 “더듬고” 있었다. 문득 그날 본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행 17:27)
더듬음의 행복
잠은 달아났고, 새로운 묵상이 시작됐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주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신비다. 그렇기에 시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러쌌다”(시 17:2)고 묘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굴을 직접 보여주시지는 않아도 등은 보여주신다. 얼굴을 보이시되 “간접적으로” 보여주신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눈으로 밝히 볼 수 있는 대낮에는 더듬어 찾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어두우면 더듬어 찾아야 한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으니까.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하나님이 그런 존재다. 하나님 앞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지성은 눈이 먼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것은 시각장애인이 목표지점을 향해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다. 시각장애인은 목표를 명료하게 보지 못한다. 그래서 목표지점에 도달하려면 흰 지팡이로 가장 가까운 지점을 두드리며 발을 떼야 한다. 좌우를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목표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다. 따라서 더듬는다는 것은 가까운 지점부터 확인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더듬으려면 공간적으로 가까워야 할 뿐 아니라 사이도 가까워야 한다. 더듬음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허용된 육감적 행복이다. 사이가 나쁘면 더듬을 수 없다. 낯선 사람을 더듬었다가는 큰일 난다. 더듬음은 육감적 침입을 허용받은 사람이 누리는 황홀한 축복이다. 결국 더듬는다는 것은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지는 사랑의 몸짓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묵상이 이쯤 이르렀을 때 나는 깨달았다. 하나님은 그날,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학생들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셨음을! 하나님은 형이상학적인 궁극의 존재도 신학적인 추상의 존재도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처럼 구체적이었고 현실적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고 한다. 무슨 뜻일까?
가깝고 친밀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하니, 벗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라. 그들의 생애를 더듬어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듬어라. 그 속에 들어있는 눈물을, 고뇌를, 불안을, 좌절을, 그리고 기도를 더듬어라.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천의 얼굴로 다가오신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형상이다.”(게오르규) 하나님을 만나려고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사막을, 산속을, 오지를 배회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지인들을 통해 현존하시니까.
이런 사실을 알면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낯선 사람들한테는 예의 발라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무례할 때가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장 탁월한 형상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폭언을 퍼붓거나 폭행을 하면서 상처를 입힐 때도 있다.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성사(聖事)인데도 말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가깝다고 막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다. 친하다고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등을 보여주신다. 허물없다고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인 신비를 보여주신다. 하여 가까울수록, 친할수록, 허물없을수록 하나님의 성사로 모실 줄 알아야 한다. 사도 요한도 말하지 않았는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사도 바울도 말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라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주시하라.
그들의 생애를 더듬어라.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더듬어라. 그 속에 들어있는 눈물을, 고뇌를, 불안을, 좌절을, 그리고 기도를 더듬어라.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천의 얼굴로 다가오신다.
기도에 대한 예의
간밤에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지난 학기에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 보낸 것이었다. 강의를 통해 기도의 길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향심기도를 하면서 느낀 점을 적어 보냈다. 그는 향심기도를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는 시간”으로 묘사했다. 표현이 재미있었고 그럴듯했다.
어느 날 그는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려고” 향심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깊은 침묵 속에서 생각들이 쏟아지고, 사역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랐다. 이런 경험은 향심기도 중에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향심기도를 꾸준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안다. 생각들과 싸우지 않고, 생각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 된다. 아무리 멋진 통찰과 영감이 떠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은 떠나가고 하나님의 현존 속에 계속 머무를 수 있다. 마음은 다시 고요해진다.
그 학생도 지침에 따라 생각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면서 향심(向心)을 계속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라도 붙들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과 만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 중에 예수님을 만나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그것은 마치 제가 교수님과 만나 차 한 잔을 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중에 제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예의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기도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기도가 지향하는 하나님에 대한 예의를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는 수행을 통해 향심기도의 핵심을 깨달은 것 같았다. 향심기도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아무리 훌륭한 영감과 통찰,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흘려보내라는 말을 계속 듣는다. 향심기도는 영감과 통찰을 얻기보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무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비움의 근육”(muscle of letting go)이 발달한다.
아무튼 나는 “기도에 대한 예의”라는 표현을 읽었을 때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존중하려는 그의 단정하고 경건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을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도 느껴졌다. 그러자 나도 경건해졌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까운 사람을 통해 구름과 어둠 속에 감춰진 얼굴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경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을 자존심 죽여가며 감당하는 일상의 수행자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자식들 굶기지 않으려고 직업의 귀천을 마다않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일하는 홀어미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개인의 일을 챙기기보다 하나님의 일에 평생 헌신한 가난한 성도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사랑과 정의에 헌신하다 병약해진 노년의 운동가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자신도 가난하면서 더 가난한 사람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나눠주는 수도자 같은 신학도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빚더미 교회를 살려보겠다고 은퇴 가깝도록 고군분투하는 친구에게서 나는 하나님의 등을 본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에게서, 평생 하나님의 뜻을 받든 겸손한 목회자에게서, 청빈한 영혼으로 내 기름진 양심에 일갈하는 고난의 종들에게서 나는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만난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한 지향을 갖고, 그 지향을 포기하지 않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들을 무너지지 않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혹여 그들이 넘어졌어도 다시 일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이 저주 같은 운명조차 감내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 사회가 버린 사람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신 분,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자기와 동일시하신 분,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려고 목숨을 바치신 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신 분, 저주 같은 십자가의 운명을 받아들이신 분,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분!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여, 그분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그분의 혈관에는 하나님의 피가 흘렀다. 그분의 전존재는 하나님으로 물들었고, 마침내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그분과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뚜렷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육화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은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바라본다. 그분을 바라보며 하나님스러워진다.
비르질 게오르규는 평생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온 아버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 평생 그 어디에서도, 그 어떤 경우에도, 심지어 꿈속에서도 내 아버지의 형상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위대한 화가들의 명화도, 감탄을 자아내는 경치도, 아름다운 여성의 빛나는 미모도,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도 내 아버지의 얼굴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버지는 하나의 이콘이었다.”(게오르규, 『25시에서 영원으로』)
경박한 물음 하나. 사람들은 나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을까? 나의 지향과 좌절을 보면서 하나님의 등을 터럭만큼이라도 보고 있을까? 나의 넘어짐과 일어섬을 보면서 하나님의 신비를 흘낏이라도 본 적 있을까?
아무려나 하나님은 만유이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는 바울의 말을 흉내내어 말해본다면, “하나님은 만인이시며 만인 안에 계신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수시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가을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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