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영적성장의 세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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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61회 작성일 23-03-22 21:52본문
프리드리히 폰 휘겔(Friedrich von Hgel)은 로마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이며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영적지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언더힐은 자신의 영적여정에서 그에게 받은 커다란 도움에 대하여 여러 자리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녀가 ‘신비주의 Mysticism’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폰 휘겔은 그녀의 연구에서 부족한 신비주의의 제도적 요소와 역사적 요소에 대하여 많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지성적 경향에 경도된 언더힐의 영성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그녀의 영성에서 결핍된 제도적 요소와 그리스도 중심성을 찾아가도록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폰 휘겔은 그의 명성에 비하여 한국에 소개된 저서는 ‘기도와 영적 삶’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 한 권 밖에 없습니다. 이 글은 영국 예수회 사제 제라드 휴스 Gerard W. Hughes의 그에 관해 언급한 ‘놀라우신 하느님’을 참조하였습니다. 폰 휘겔은 자신의 대표적인 저서 ‘종교의 신비적 요소The Mystical Element of Religion’에서 신비주의가 지닌 잠재적 위험요소에 대하여 예리한 지적을 하였는데, 그의 지적은 영성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 시대의 그리스인들도 경청해야 할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폰 휘겔은 모든 종교는 역사적(제도적) 요소와 지적(비판적) 요소 그리고 신비적(경험적)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데, 신비적 요소는 다른 두 가지 요소와 함께 종교의 풍부한 복합성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신비적 요소가 결코 종교의 전체가 될 수 없으며, 신비적 요소를 종교의 전체라고 주장하는 순간 위험한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적 성장의 세 요소
폰 휘겔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격발달의 세 단계를 영적성장의 여정에 빗대어 설명하였습니다.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인 유아기는 종교의 제도적 요소와 많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유아기의 활동은 신체적 운동과 감각적 느낌(음식과 온기, 보호, 애정)을 근간으로, 모방하고 말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교육적 도약기에 해당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가족과 지역의 역사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로 아이의 기억을 채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는 듣는 이야기들을 모두 사실로 수용하는데, 폰 휘겔은 이처럼 고지식한 초기 단계 없이 학습 과정은 시작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 시기 가장 절실한 정서적 욕구는 보호와 애정이며, 이 단계에서 아이는 인간답게 성장하는 능력과 신뢰할 줄 아는 능력을 훈련받습니다. 이 단계에서의 신앙교육은 사실적인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윤리적 교훈도 병행되어야 하며, 역사와 교리, 윤리를 가르치되 아이가 흡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이같은 수용단계가 없으면, 의문의 토대가 될 만한 것을 갖출 수 없고, 다음 단계인 사춘기(비판적)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단계의 위험은 이 단계가 너무 만족스러운 나머지 유아기적 상태에 계속 머물려고 하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지독한 불편과 직면하면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살핌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 멈추어 있는 사람들은 전례와 성사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종교적 지침을 전달받으며, 자신이 배운 교회의 윤리적. 교리적 가르침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진전을 원치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자들은 종종 회중들이 이 단계에 머물도록 부추기고, 이를 겸손하고 충실하다고 칭찬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순종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로 위협하기도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유아기의 모든 요소들이 다음 단계에서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적 온전함을 위해 유아기의 어떤 요소들은 사춘기와 성년기에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년이 된 후에도 정신만이 아니라 정서적 돌봄을 필요로 하며, 오감으로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감각과 느낌, 표상과 상징을 통해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成人)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영성은 교회의 건축양식과 성물들, 빛깔과 채광, 설비, 음향, 실내 온도 등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영적 여정을 걷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춘기로 종교의 비판적 단계의 요소들과 많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사춘기 단계는 성(性)적 자각과 성숙이 이루어지는 단계 그 이상입니다. 마음에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신앙에 대한 의문들이 시작되고, 다양한 만남과 교육, 독서와 체험을 넓혀 가면서 자기 신앙의 통일성과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만일 교회가 사춘기의 이같은 인간적 체험과 성찰을 무시하거나, 억압한다면, 그 교회는 신자들의 의문제기와 주체적 사고를 저지할 수 있는 동안에만 존속이 가능 할 것이며,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해하는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며, 그 분은 교회만이 아니라 만물 안에 내재하시고, 피조세계 자체가 그 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연구와 배움을 더 없이 강조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모(Anselm)는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르침의 일관성에만 관심을 쏟고, 그 가르침을 매일의 체험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유아기(제도적) 단계의 교회는 편집증 환자처럼 처신하는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는 모든 부문에서 의미를 탐구하는 지성적 열정을 그 특징으로 하며, 비판적이며 의문을 제기하고, 하느님과 인생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구성원 안에서 비판적 요소를 촉진시켜야 하며. 그 일을 못할 때 신자들은 종교적 믿음을 일상적 체험과 통합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질문과 도전 앞에서 진리에 복종할 채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 단계의 위험은 유아기 단계에서 누리던 안전과 보호와 애정을 무시하는 위험입니다. 삶의 필요는 의미만이 아니라 애정과 지원과 보호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의문제기를 중단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위험은 비판적 요소가 나머지 두 요소, 제도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에서 떨어져 나가면, 신앙인이 아니라 이성주의자가 출현하게 되고, 이들은 감각과 신비를 폄하하고 불신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성년기는 종교의 신비적 요소와 많은 내용을 공유하는 단계입니다. 성년기는 성숙한 자각을 그 특징으로 하며, 내면의 의식- 활동, 만남과 관계, 복합적인 느낌과 감정, 두려움과 기대, 희망과 절망, 확신과 의혹 등 -을 보다 뚜렷하게 자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경이(驚異)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며, 참 자아에 보다 가까워지고, 신비가들이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분으로 체험한 하느님께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감추어진 신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참된 행복과 인간성의 열쇠를 발견합니다. 이 단계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은 이제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곧잘 두려움을 유발하는 마음과 기억의 후미진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하느님은 바깥보다는 내면에서, 개념화되기보다 사랑받는 생활로 체험되고, 제도적 단계의 규율이나 비판적 단계의 지적 추론이 아니라 경이로운 하느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길과 다른 하느님의 길,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생각, 개념이 아니라 직접적인 만남으로 하느님을 경험하며, 신비로운 내적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성숙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영적 지도자의 격려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의 위험은 자신의 영적여정에서 제도적 요소를 배격하고, 전승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신학과 철학 일체가 내면에서 발견되는 깊은 진리를 표현하는데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영성생활에서 공동기도와 예배가 배척당하고, 윤리적. 교의적 가르침도 기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비적 요소가 비판적 요소로부터 제어 받지 않음으로 이해불가능한 감정주의가 팽창할 수 있으며, 최악의 상태에 이르면 제도적 요소 및 비판적 요소와 단절되어 제어력을 잃은 신비적 요소가 위험한 혼합주의나 광신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아기 요구와 행위가 사춘기에 이르러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사춘기의 요구와 행위 또한 성년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적여정의 다음 단계로 성장하면서 이전의 요구와 행위가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할 따름입니다. 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단계에서든 한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두 요소를 배제시키거나,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함으로 남은 한 가지를 배제시킴으로 구성원의 종교적 발달을 저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제도적 단계라는 유아기와 비판적 단계라는 사춘기를 완전히 극복하기까지는 결코 신비적 단계에 진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 폰 휘겔의 분석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유아기와 사춘기의 남은 찌꺼기들을 발견하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찌꺼기들이 드러날 때, 이것을 감지하고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 말로 영적지도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폰 휘겔은 모든 종교는 역사적(제도적) 요소와 지적(비판적) 요소 그리고 신비적(경험적)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데, 신비적 요소는 다른 두 가지 요소와 함께 종교의 풍부한 복합성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한 가지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신비적 요소가 결코 종교의 전체가 될 수 없으며, 신비적 요소를 종교의 전체라고 주장하는 순간 위험한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적 성장의 세 요소
폰 휘겔은 자신의 저서에서 인격발달의 세 단계를 영적성장의 여정에 빗대어 설명하였습니다.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인 유아기는 종교의 제도적 요소와 많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유아기의 활동은 신체적 운동과 감각적 느낌(음식과 온기, 보호, 애정)을 근간으로, 모방하고 말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교육적 도약기에 해당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가족과 지역의 역사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로 아이의 기억을 채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는 듣는 이야기들을 모두 사실로 수용하는데, 폰 휘겔은 이처럼 고지식한 초기 단계 없이 학습 과정은 시작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 시기 가장 절실한 정서적 욕구는 보호와 애정이며, 이 단계에서 아이는 인간답게 성장하는 능력과 신뢰할 줄 아는 능력을 훈련받습니다. 이 단계에서의 신앙교육은 사실적인 정보 전달만이 아니라 윤리적 교훈도 병행되어야 하며, 역사와 교리, 윤리를 가르치되 아이가 흡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이같은 수용단계가 없으면, 의문의 토대가 될 만한 것을 갖출 수 없고, 다음 단계인 사춘기(비판적) 단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단계의 위험은 이 단계가 너무 만족스러운 나머지 유아기적 상태에 계속 머물려고 하는 것이며,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지독한 불편과 직면하면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아프다는 핑계로 보살핌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 멈추어 있는 사람들은 전례와 성사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종교적 지침을 전달받으며, 자신이 배운 교회의 윤리적. 교리적 가르침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진전을 원치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권위자들은 종종 회중들이 이 단계에 머물도록 부추기고, 이를 겸손하고 충실하다고 칭찬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순종의 죄와 하느님의 분노로 위협하기도 합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유아기의 모든 요소들이 다음 단계에서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적 온전함을 위해 유아기의 어떤 요소들은 사춘기와 성년기에서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년이 된 후에도 정신만이 아니라 정서적 돌봄을 필요로 하며, 오감으로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감각과 느낌, 표상과 상징을 통해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인(成人)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영성은 교회의 건축양식과 성물들, 빛깔과 채광, 설비, 음향, 실내 온도 등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영적 여정을 걷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춘기로 종교의 비판적 단계의 요소들과 많은 내용을 공유합니다. 사춘기 단계는 성(性)적 자각과 성숙이 이루어지는 단계 그 이상입니다. 마음에서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신앙에 대한 의문들이 시작되고, 다양한 만남과 교육, 독서와 체험을 넓혀 가면서 자기 신앙의 통일성과 의미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작됩니다. 만일 교회가 사춘기의 이같은 인간적 체험과 성찰을 무시하거나, 억압한다면, 그 교회는 신자들의 의문제기와 주체적 사고를 저지할 수 있는 동안에만 존속이 가능 할 것이며,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권위적인 공동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이해하는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며, 그 분은 교회만이 아니라 만물 안에 내재하시고, 피조세계 자체가 그 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연구와 배움을 더 없이 강조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안셀모(Anselm)는 신앙은 ‘이해를 추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가르침의 일관성에만 관심을 쏟고, 그 가르침을 매일의 체험과 연결시키지 못하는 유아기(제도적) 단계의 교회는 편집증 환자처럼 처신하는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교는 모든 부문에서 의미를 탐구하는 지성적 열정을 그 특징으로 하며, 비판적이며 의문을 제기하고, 하느님과 인생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구성원 안에서 비판적 요소를 촉진시켜야 하며. 그 일을 못할 때 신자들은 종교적 믿음을 일상적 체험과 통합시키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질문과 도전 앞에서 진리에 복종할 채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 단계의 위험은 유아기 단계에서 누리던 안전과 보호와 애정을 무시하는 위험입니다. 삶의 필요는 의미만이 아니라 애정과 지원과 보호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의문제기를 중단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위험은 비판적 요소가 나머지 두 요소, 제도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에서 떨어져 나가면, 신앙인이 아니라 이성주의자가 출현하게 되고, 이들은 감각과 신비를 폄하하고 불신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인 성년기는 종교의 신비적 요소와 많은 내용을 공유하는 단계입니다. 성년기는 성숙한 자각을 그 특징으로 하며, 내면의 의식- 활동, 만남과 관계, 복합적인 느낌과 감정, 두려움과 기대, 희망과 절망, 확신과 의혹 등 -을 보다 뚜렷하게 자각합니다. 세계에 대한 경이(驚異)와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며, 참 자아에 보다 가까워지고, 신비가들이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분으로 체험한 하느님께 점점 가까이 다가갑니다. 감추어진 신비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참된 행복과 인간성의 열쇠를 발견합니다. 이 단계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은 이제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곧잘 두려움을 유발하는 마음과 기억의 후미진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 하느님은 바깥보다는 내면에서, 개념화되기보다 사랑받는 생활로 체험되고, 제도적 단계의 규율이나 비판적 단계의 지적 추론이 아니라 경이로운 하느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길과 다른 하느님의 길, 우리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생각, 개념이 아니라 직접적인 만남으로 하느님을 경험하며, 신비로운 내적 체험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성숙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좋은 영적 지도자의 격려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의 위험은 자신의 영적여정에서 제도적 요소를 배격하고, 전승과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추상적인 신학과 철학 일체가 내면에서 발견되는 깊은 진리를 표현하는데 전적으로 부적절하다고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영성생활에서 공동기도와 예배가 배척당하고, 윤리적. 교의적 가르침도 기피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비적 요소가 비판적 요소로부터 제어 받지 않음으로 이해불가능한 감정주의가 팽창할 수 있으며, 최악의 상태에 이르면 제도적 요소 및 비판적 요소와 단절되어 제어력을 잃은 신비적 요소가 위험한 혼합주의나 광신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아기 요구와 행위가 사춘기에 이르러 소멸되는 것이 아니며, 사춘기의 요구와 행위 또한 성년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적여정의 다음 단계로 성장하면서 이전의 요구와 행위가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할 따름입니다. 종교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어느 단계에서든 한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다른 두 요소를 배제시키거나, 두 가지 요소를 강조함으로 남은 한 가지를 배제시킴으로 구성원의 종교적 발달을 저해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제도적 단계라는 유아기와 비판적 단계라는 사춘기를 완전히 극복하기까지는 결코 신비적 단계에 진입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 폰 휘겔의 분석은 우리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유아기와 사춘기의 남은 찌꺼기들을 발견하도록 돕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찌꺼기들이 드러날 때, 이것을 감지하고 제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 말로 영적지도의 중요한 과제일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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