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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기도와 고행(苦行) 그리고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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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02회 작성일 23-03-22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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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고행이라는 단어는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켜 온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재로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고행이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그릇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분들을 자주 만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금욕적인 관습이란 건전한 것일 수도 있고, 그렇치 못할 수도 있는데 그것의 온전함을 측정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금욕적인 관습이 피조세계의 선함을 증거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보다 잘 섬기게 하며, 하느님 의 뜻을 위하여 좋은 것이라도 포기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피조세계와 몸,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性)의 선함을 부인하는 것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준은 하느님의 은혜 대신 인간의 노력을 우선시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그 노력이 하느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자기추구의 노력인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용서와 은혜에 대한 반응에서 시작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용서해 주신 죄들을 대속하기 위한 자기형벌인가? 아니면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속에서 달리는 운동선수의 자유로운 선택인가? 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고행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는 외적 고행은 몸에 대해 과다한 고통을 가하거나, 신체적 어려움을 견디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적인 고행은 아주 작은 죄라도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생각이나 욕망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존재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이해는 고행에 대한 부분적 진실을 담고 있기는 하나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고행에 대하여 충분하고 명료한 이해를 담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면과 외면이라는 배타적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욕망과 동기는 외적인 행동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중요한 요소이며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을 외면화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이해하고 있으며, 고행을 육체와 영혼이라는 전인격에 적용할 수 있는 무엇으로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행을 단지 즐거움에 대한 거절이나 고통스러운 형벌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해하는 고행에 대한 잘못된 오해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교가 이해하는 고행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명확한 목표를 향하여 질서 짓는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의 목적은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께 모으고, 우리의 갈망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함으로 우리가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고행의 목적은 하느님과 연합하여 하나 되기 위함이며,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를 비워드리는 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고행과 금욕의 목적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함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행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함에 있습니다. 이같은 수련을 우리는 비로소 고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행에는 이기적인 동기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고행은 억지스러움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삶에 자연스런 기쁨을 선물하는 하느님의 뜻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보다 그것을 주시는 하느님의 선함을 더욱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하여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같은 고행을 실천합니다. 그같은 고행을 실천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것을 실천하게 됩니다. 집착이 아니라 전적인 단순함으로 그것들을 즐기면서 의무적인 이행이나, 편협한 불쾌함 속에 머물기보다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향하여 응답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고행이란 본질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지키고 우리 갈망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절제는 우리 전체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극단적이고 왜곡된 금욕주의는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의 선물인 우리의 몸과 우리 주위의 세계를 무시하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율법적인 금욕주의에는 개인의 공로를 중시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경시하는 태도로 기울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금욕주의는 보다 선하고 고귀한 것을 위해서 덜 선한 것을 거부할 수 있는 건전한 의식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해 주는 동시에 자신감을 줍니다. 

인내 –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만일 우리가 정말로 기도와 거룩함에 대하여 충분히 진지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어려운 미덕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내, 거듭되는 실패를 하게 될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인내입니다. 하지만 빠른 속도와 경쟁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인내란 정말 쉽지 않은 미덕입니다. 우리는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퀵  서비스와 인스턴트 음식문화에 길들여져 있고, 즉각적인 해결과 빠른 만족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聖化)의 여정은 도공(陶工)이 가마에서 구워지는 도자기를 기다리듯 기다림과 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나무가 서서히 자라는 시간을 기다리고, 우리의 신체가 점차 성장하는 것을 기다리듯이 우리의 영적인 성장에도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됩니다. 영적인 성장은 고층건물을 세우듯 그렇게 기계적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은총보다 더 빨리 갈 수 없다.’고 말한 시몬 베이유 Simone Veil의 말처럼 ‘하느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갈망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신비로운 시간을 고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이사 55:8) 그 분은 우리의 종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만일 그 분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행하신다면, 그 분은 우리의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해 놓은 일정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며, 우리가 정해 놓은 시간에 오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KTX 열차나 비행기가 아니고 사랑이십니다.

인내에는 두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인내는 시간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내는 즉각적인 만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성서가 첫 번째 사랑의 속성을 ‘오래 참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래 참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잘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3:4) 둘째로 인내는 실패와 관련이 있습니다. 인내는 실패와 씨름하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인내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도록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우리가 실패에 민감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실패에 정직하지 못하고, 이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실패는 우리를 교만으로 이끌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실패로 낙담만 하고 있다면 실패는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실패에 민감해 진다는 것은 교만과 절망 사이, 그 어느 중간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바라보고 인정하되 동시에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며 더 먼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패가 없는 곳에는 죄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우리의 나약함에 대하여 걱정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악한 영은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 걱정하라고 속삭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한 후에는 자유롭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가 죄 짓기 전에 자유롭기를, 그 자유로 죄를 선택하라고 부추깁니다. 죄에 무감한 교만과 절망은 모두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교만과 절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분리시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님들도 우리가 지상에서 지은 잘못을 반성하고 새롭게 출발하기를 바라시듯이 하늘 어버이께서도 우리가 실패에 붙잡혀 있기를 원하지 않으시며, 새롭게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잘못을 하고도 자신감에 차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잘못을 하고 자기비하에만 빠져있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교만도, 절망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와 도우심을 믿으며 항상 다시 시작하길 원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로마 7:18

이같은 통찰은 우리를 절망하도록 만들지도, 무력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심을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인 우리와 나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선하신 선물을 나누어 받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깊은 곳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에 동의하고, 그 안내를 받고자 기꺼이 복종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 삶을 가꾸어 가실 수 있습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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