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현존인지감수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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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65회 작성일 23-08-01 10:37본문
On Presence Sensitivity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시편 139:7)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과 숨바꼭질하면서 발각되기를 바라신다.
(바알 셈 토브)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엡 3:19)
십여 년쯤 전의 일이다. 한 교계 원로가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동참했다. 모든 참석자가 맛있게 잘 먹었고, 고생한다며 자리를 만들어준 원로에게 저마다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식사가 끝나자 내 옆에 앉았던 목회자가 일어나더니 사람 수대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왔다. 교회개척을 하고 그해 안수를 받은 여자 목사였다. 그때 원로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커피는 여자가 타주는 게 맛있어…”
원로에게 그 순간의 여자 후배는 목사도 동역자도, 고생하는 미자립교회 사역자도 아니었고 커피를 타주는 서비스업 종사자였다. 이 순간 원로의 성인지감수성은 꽝이었다. 여자 후배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임 후 원로와 따로 대화하는 자리에서 나는 원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그런 식으로 말하면 큰일 난다고. 다행히 원로는 내 말을 건방진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성인지감수성”(gender sensitivity)은 1995년 UN이 주최한 〈제4차 세계여성대회〉 선언문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여성가족부는 성인지감수성을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으로 규정한다. 법조계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성에 대한 차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나 “성별의 불균형에 따른 유・불리함을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성폭력・성희롱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함”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존재와 현존
성인지감수성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지표라면 신앙인의 의식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지표는 무엇일까?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 다양하게 측정할 수 있겠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존인지감수성”presence sensitivity이다. 현존인지감수성이란 “일상생활 혹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알아차리는 영적 민감성”을 뜻한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현존인지감수성은 어느 정도 될까? 언젠가 기도세미나에서 〈현존기도〉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실습을 하려는데, 한 참여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현존, 현존, 하는데 대체 현존이 뭐냐는…. 그러면서 현존이라는 말이 낯설다면서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놀랐다. 그 사람은 목사였다. 물론 그이는 “현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존의 의미를 설명할 때마다 나는 교실을 예로 든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조용했던 교실은 떠들썩해진다. 개구쟁이들이 많은 교실은 난장판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이 교실에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교무실이든 운동장이든 어디엔가 선생님은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선생님이 교실 밖에 존재해도 교실 안에 현존하지 않으면 교실은 엉망진창이 된다. 하지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현존하면), 교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다.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 삶은 선생님이 현존하지 않는 교실과 같다. 삶은 무질서해지고 혼돈에 빠진다. 반대로 하나님이 현존하는 삶은 선생님이 계신 교실처럼 질서 있고 조화로워진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선 모든 게 신성으로 빛난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과 일상에 현존하지 않는 한, 신앙인의 삶은 비신앙인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신앙의 위기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질 때 찾아온다. 근본주의자들의 숨막히는 교리주의, 원칙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결여한 율법주의, 도덕주의자들의 오만한 금욕주의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마비될 때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질병이다. 이런 것들은 신성・신비와의 접촉이 끊어질 때 밀려오는 영적 공허를 면하려고 만들어낸 종교적 위장(僞裝)이다. 내면이 공허하고 영성이 빈곤한 사람들이 겉치레에 집착하듯,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 신성과 접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통과 율법, 도덕과 형식에 집착한다. 영적 황폐화는 현존인지감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존인지감수성의 상실은 영혼을 파괴하는 최악의 무기다.
신앙의 위기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질 때 찾아온다. 근본주의자들의 숨 막히는 교리주의, 원칙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결여한 율법주의, 도덕주의자들의 오만한 금욕주의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마비될 때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질병이다.
반대로 현존인지감수성이 깨어나면 영혼에 생기가 돈다. 사랑과 공감, 포용과 용납의 꽃이 만발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회복은 현존인지감수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종교를 라틴어로 “렐리지오”religio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시”re “연결한다”ligare는 뜻이다. 현존인지감수성이야말로 전통과 율법, 의례儀禮를 낳은 신성에 대한 원초적 경험과 “다시-연결해준다.” 현존인지감수성이 깨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고,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 경외감을 회복한다. 18세기에 유대교에서 일어난 “하시디즘”Hasidism 운동이 그랬다.
하시디즘의 현존인지감수성
하시디즘은 18세기 동부유럽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개혁운동이었다. “하시드”는 “경건한 사람”을 뜻한다. 하시디즘은 참된 경건과 살아있는 영성을 회복하려 했는데, 창시자는 바알 셈 토브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이 초라한 세계 속에, 모든 하잘것없는 사물 속에, 특히 사람 속에 현존하는 신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다.”(『어둠 속에 갇힌 불꽃』) 한 마디로, 현존인지감수성을 일깨운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계신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경험한 영적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영혼은 파리해져 갔다. 지성소 경험 곧 하나님 현존 경험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지성소 경험이 차단된 유대교는 율법종교로 경직되기 시작했고, 바리사이적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영혼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알 셈 토브였다. 헤셸은 그의 출현을 “마치 ‘빛이 생겨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 것 같았다”고 묘사한다.
바알 셈은 건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한 인간이 거룩하신 분의 거처가 될 수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을 피해 숨어계시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바알 셈은 이런 생각을 거부했다. 숨어계신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발각되기를 바라신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그를 찾는 일을 잊어버렸다. 모든 곳,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감지하는 현존인지감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다. 우리의 감각은 하나님의 부재를 믿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로 끌어내리신다.” 하나님이 사물의 위치로 낮아짐으로써 사물은 위대해진다. 하여 바알 셈은 탄식한다. “땅 위에 있는 사물들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그들은 삶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듯 행동한다. 모든 하찮은 것들이 신성神性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르고….”
땅 위에 있는 사물들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그들은 삶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듯 행동한다. 모든 하찮은 것들이 신성(神性)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르고….
대개의 종교는 말한다. 신성神性에 이르려면 먼저 속성俗性을 버리라고, 성스러움과 저속함은 서로에게 배타적이라고, 영혼의 세계는 영원하고 지금 여기의 세계는 헛되다고! 하지만 바알 셈은 묻는다. “그분이 창조한 세계를 찬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거룩하시며 숨어계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바알 셈에게 하나님을 공경한다면서 그분이 만든 것들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무례한 일이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악인이 물질의 덫에 걸려있는 사람이라면, 의인은 사물들 안에 내재한 신성의 신비에 매혹된 사람이다. (…) 사물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하는 한 방편이다.” 바알 셈에게는 천박한 욕망조차 창조자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그는 욕망이나 색정을 뿌리뽑으려 하지 말고 변형시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이 신성의 통로라면 사람의 영혼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의 영혼은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흙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만 생각한다. 이는 큰 잘못이다. “사람의 가장 큰 죄는 자기가 왕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하여, 바알 셈은 “죄인들조차 비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잘 알려진 마르크 샤갈도 하시디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신성한 불꽃을 비춘다는 하시디즘의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영성에 심취한 샤갈은 사람과 동물과 사물을 대등한 존재로 여긴다. 신성의 불꽃은 이들 모두를 통해서도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갈은 인간과 동물을 평등하게 그린다. 그의 작품 〈농부의 삶〉에 나오는 농부와 암소는 크기가 거의 같다.(위 그림 참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와 마을〉에 나오는 암소와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데, 암소의 눈에는 사람의 눈동자가, 사람의 눈엔 암소의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아래 그림 참조) 작품 속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평등하다. 그리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이러한 평등성의 기초가 바로 모든 것 안에 현존하는 신성한 불꽃이다. 샤갈은 현존인지감수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일상의 현존인지감수성
성경은 현존인지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아브라함은 일상 한가운데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요셉은 고난의 삶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
그 누구보다 현존인지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땅에 있는 사물들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며 감탄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 그의 현존인지감수성은 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온 땅이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시 66:4) 그는 하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시 19:1) 시편 139편은 다윗의 현존인지감수성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 139: 7-10)
신앙인이란 현존인지감수성을 통해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5세기에 활동한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은 현존인지감수성이 풍부한 기도문을 남겼다. “나 오늘 일어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과 기도에 힘입어”로 시작하는 기도는 7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 앞에 계시며 내 뒤에도 계십니다.
내 안에도 계십니다.
내 아래에도 계시며 내 위에도 계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내가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 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의 귓속에도 계십니다.
성인은 앞과 뒤, 위와 아래 모든 방향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눈과 내 말을 듣는 귀”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한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길이 빛날 현존인지감수성이 아닐 수 없다.
Jeremy Winborg (1979~ ) 백인과 원주민 인디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876년, 로즈버드 전투와 리틀빅혼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친 인디언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Buffalo Calf Road Woman(1844~1879) 명사수이기도 했던 <물소 송아지 길의 여자>는 등에다 아기를 업은 채 남편 '블랙 코요태'와 함께 전투에 나가서 동생을 구하고, 백인 장군을 쓰러뜨린 여전사였다.
현존인지감수성은 성인처럼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식사기도”도 소박하지만 현존인지감수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사람들을 축복하소서.
유통한 상인들,
배달한 노동자들을 축복하소서.
가공, 판매, 조리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를 축복하소서.
이들의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
먹이가 되어 제 안에 들어오실 때마다
저의 살과 피가 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식사 때마다 기도를 드리는 무명의 수행자는 밥 한 술을 뜨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 농부와 어부, 상인과 노동자, 가공하고 판매한 사람, 조리사와 주부 등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데 무명의 수행자는 이들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현존인지감수성이 열려있고 깨어있다. 하지만 수행자의 현존인지감수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먹는다.”
오, 식사 때마다 하나님을 먹는 현존인지감수성이라니! 하나님이 살과 피가 되는 상상이라니!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하나님의 온갖 충만”의 경지 아닐까.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19)
- 이민재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시편 139:7)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과 숨바꼭질하면서 발각되기를 바라신다.
(바알 셈 토브)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엡 3:19)
십여 년쯤 전의 일이다. 한 교계 원로가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 동참했다. 모든 참석자가 맛있게 잘 먹었고, 고생한다며 자리를 만들어준 원로에게 저마다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식사가 끝나자 내 옆에 앉았던 목회자가 일어나더니 사람 수대로 자판기 커피를 뽑아왔다. 교회개척을 하고 그해 안수를 받은 여자 목사였다. 그때 원로의 입에서 듣기 거북한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커피는 여자가 타주는 게 맛있어…”
원로에게 그 순간의 여자 후배는 목사도 동역자도, 고생하는 미자립교회 사역자도 아니었고 커피를 타주는 서비스업 종사자였다. 이 순간 원로의 성인지감수성은 꽝이었다. 여자 후배는 어색하게 웃었지만,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임 후 원로와 따로 대화하는 자리에서 나는 원로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그런 식으로 말하면 큰일 난다고. 다행히 원로는 내 말을 건방진 충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성인지감수성”(gender sensitivity)은 1995년 UN이 주최한 〈제4차 세계여성대회〉 선언문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여성가족부는 성인지감수성을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으로 규정한다. 법조계에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성에 대한 차별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나 “성별의 불균형에 따른 유・불리함을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성폭력・성희롱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함”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존재와 현존
성인지감수성이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지표라면 신앙인의 의식 수준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 지표는 무엇일까? 정치・경제・사회・문화 영역에서 다양하게 측정할 수 있겠지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존인지감수성”presence sensitivity이다. 현존인지감수성이란 “일상생활 혹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알아차리는 영적 민감성”을 뜻한다.
그러면 한국교회의 현존인지감수성은 어느 정도 될까? 언젠가 기도세미나에서 〈현존기도〉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실습을 하려는데, 한 참여자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현존, 현존, 하는데 대체 현존이 뭐냐는…. 그러면서 현존이라는 말이 낯설다면서 설명해달라는 것이다. 놀랐다. 그 사람은 목사였다. 물론 그이는 “현존”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와닿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주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존의 의미를 설명할 때마다 나는 교실을 예로 든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면 조용했던 교실은 떠들썩해진다. 개구쟁이들이 많은 교실은 난장판이 되기도 한다. 선생님이 교실에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교실에 현존하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교무실이든 운동장이든 어디엔가 선생님은 “존재”한다. 하지만 아무리 선생님이 교실 밖에 존재해도 교실 안에 현존하지 않으면 교실은 엉망진창이 된다. 하지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현존하면), 교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진다.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현존하지 않는 삶은 선생님이 현존하지 않는 교실과 같다. 삶은 무질서해지고 혼돈에 빠진다. 반대로 하나님이 현존하는 삶은 선생님이 계신 교실처럼 질서 있고 조화로워진다. 하나님의 현존 속에선 모든 게 신성으로 빛난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과 일상에 현존하지 않는 한, 신앙인의 삶은 비신앙인의 삶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신앙의 위기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질 때 찾아온다. 근본주의자들의 숨막히는 교리주의, 원칙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결여한 율법주의, 도덕주의자들의 오만한 금욕주의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마비될 때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질병이다. 이런 것들은 신성・신비와의 접촉이 끊어질 때 밀려오는 영적 공허를 면하려고 만들어낸 종교적 위장(僞裝)이다. 내면이 공허하고 영성이 빈곤한 사람들이 겉치레에 집착하듯,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 신성과 접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전통과 율법, 도덕과 형식에 집착한다. 영적 황폐화는 현존인지감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존인지감수성의 상실은 영혼을 파괴하는 최악의 무기다.
신앙의 위기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무뎌질 때 찾아온다. 근본주의자들의 숨 막히는 교리주의, 원칙주의자들의 상상력을 결여한 율법주의, 도덕주의자들의 오만한 금욕주의는 현존인지감수성이 마비될 때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영혼의 질병이다.
반대로 현존인지감수성이 깨어나면 영혼에 생기가 돈다. 사랑과 공감, 포용과 용납의 꽃이 만발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회복은 현존인지감수성의 회복에 달려있다. 종교를 라틴어로 “렐리지오”religio라고 하는데 이 말은 “다시”re “연결한다”ligare는 뜻이다. 현존인지감수성이야말로 전통과 율법, 의례儀禮를 낳은 신성에 대한 원초적 경험과 “다시-연결해준다.” 현존인지감수성이 깨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고, 하나님에 대한 원초적 경외감을 회복한다. 18세기에 유대교에서 일어난 “하시디즘”Hasidism 운동이 그랬다.
하시디즘의 현존인지감수성
하시디즘은 18세기 동부유럽에서 시작된 유대교의 개혁운동이었다. “하시드”는 “경건한 사람”을 뜻한다. 하시디즘은 참된 경건과 살아있는 영성을 회복하려 했는데, 창시자는 바알 셈 토브로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이 초라한 세계 속에, 모든 하잘것없는 사물 속에, 특히 사람 속에 현존하는 신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다.”(『어둠 속에 갇힌 불꽃』) 한 마디로, 현존인지감수성을 일깨운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계신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경험한 영적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의 영혼은 파리해져 갔다. 지성소 경험 곧 하나님 현존 경험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지성소 경험이 차단된 유대교는 율법종교로 경직되기 시작했고, 바리사이적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영혼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알 셈 토브였다. 헤셸은 그의 출현을 “마치 ‘빛이 생겨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진 것 같았다”고 묘사한다.
바알 셈은 건물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한 인간이 거룩하신 분의 거처가 될 수 있다!”고 외쳤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을 피해 숨어계시는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바알 셈은 이런 생각을 거부했다. 숨어계신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발각되기를 바라신다.” 문제는 우리다. 우리는 그를 찾는 일을 잊어버렸다. 모든 곳,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감지하는 현존인지감수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다. 우리의 감각은 하나님의 부재를 믿으라고 속삭인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 “눈에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눈높이로 끌어내리신다.” 하나님이 사물의 위치로 낮아짐으로써 사물은 위대해진다. 하여 바알 셈은 탄식한다. “땅 위에 있는 사물들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그들은 삶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듯 행동한다. 모든 하찮은 것들이 신성神性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르고….”
땅 위에 있는 사물들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그들은 삶이 아주 하찮은 것이라는 듯 행동한다. 모든 하찮은 것들이 신성(神性)으로 가득 차 있음을 모르고….
대개의 종교는 말한다. 신성神性에 이르려면 먼저 속성俗性을 버리라고, 성스러움과 저속함은 서로에게 배타적이라고, 영혼의 세계는 영원하고 지금 여기의 세계는 헛되다고! 하지만 바알 셈은 묻는다. “그분이 창조한 세계를 찬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거룩하시며 숨어계신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바알 셈에게 하나님을 공경한다면서 그분이 만든 것들을 업신여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무례한 일이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악인이 물질의 덫에 걸려있는 사람이라면, 의인은 사물들 안에 내재한 신성의 신비에 매혹된 사람이다. (…) 사물은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접근하는 한 방편이다.” 바알 셈에게는 천박한 욕망조차 창조자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는 통로다. 따라서 그는 욕망이나 색정을 뿌리뽑으려 하지 말고 변형시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들이 신성의 통로라면 사람의 영혼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의 영혼은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이 흙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만 생각한다. 이는 큰 잘못이다. “사람의 가장 큰 죄는 자기가 왕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하여, 바알 셈은 “죄인들조차 비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잘 알려진 마르크 샤갈도 하시디즘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신성한 불꽃을 비춘다는 하시디즘의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영성에 심취한 샤갈은 사람과 동물과 사물을 대등한 존재로 여긴다. 신성의 불꽃은 이들 모두를 통해서도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갈은 인간과 동물을 평등하게 그린다. 그의 작품 〈농부의 삶〉에 나오는 농부와 암소는 크기가 거의 같다.(위 그림 참조)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와 마을〉에 나오는 암소와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데, 암소의 눈에는 사람의 눈동자가, 사람의 눈엔 암소의 눈동자가 그려져 있다.(아래 그림 참조) 작품 속에서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평등하다. 그리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이러한 평등성의 기초가 바로 모든 것 안에 현존하는 신성한 불꽃이다. 샤갈은 현존인지감수성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일상의 현존인지감수성
성경은 현존인지감수성이 민감한 사람들의 삶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남들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아브라함은 일상 한가운데에서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야곱은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요셉은 고난의 삶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
그 누구보다 현존인지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땅에 있는 사물들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며 감탄한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1) 그의 현존인지감수성은 땅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는다. “온 땅이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시 66:4) 그는 하늘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시 19:1) 시편 139편은 다윗의 현존인지감수성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 139: 7-10)
신앙인이란 현존인지감수성을 통해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5세기에 활동한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은 현존인지감수성이 풍부한 기도문을 남겼다. “나 오늘 일어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과 기도에 힘입어”로 시작하는 기도는 7연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내 앞에 계시며 내 뒤에도 계십니다.
내 안에도 계십니다.
내 아래에도 계시며 내 위에도 계십니다.
내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내가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모든 이들의 입 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의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모든 이들의 귓속에도 계십니다.
성인은 앞과 뒤, 위와 아래 모든 방향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눈과 내 말을 듣는 귀” 속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한다. 기독교 영성사에서 길이 빛날 현존인지감수성이 아닐 수 없다.
Jeremy Winborg (1979~ ) 백인과 원주민 인디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876년, 로즈버드 전투와 리틀빅혼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친 인디언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Buffalo Calf Road Woman(1844~1879) 명사수이기도 했던 <물소 송아지 길의 여자>는 등에다 아기를 업은 채 남편 '블랙 코요태'와 함께 전투에 나가서 동생을 구하고, 백인 장군을 쓰러뜨린 여전사였다.
현존인지감수성은 성인처럼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어느 그리스도인의 식사기도”도 소박하지만 현존인지감수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사람들을 축복하소서.
유통한 상인들,
배달한 노동자들을 축복하소서.
가공, 판매, 조리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를 축복하소서.
이들의 배후에서 일하신 하나님,
먹이가 되어 제 안에 들어오실 때마다
저의 살과 피가 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식사 때마다 기도를 드리는 무명의 수행자는 밥 한 술을 뜨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 농부와 어부, 상인과 노동자, 가공하고 판매한 사람, 조리사와 주부 등을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런데 무명의 수행자는 이들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음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현존인지감수성이 열려있고 깨어있다. 하지만 수행자의 현존인지감수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먹는다.”
오, 식사 때마다 하나님을 먹는 현존인지감수성이라니! 하나님이 살과 피가 되는 상상이라니!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하나님의 온갖 충만”의 경지 아닐까.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엡 3:19)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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