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스타트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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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20회 작성일 24-04-23 12:28본문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라.
(레 1:3)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롬 5:20)
스타트 어게인, 다시 시작해 봐!
이 말에는 실패한 사람에 대한 격려가 들어있다.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에 대한 응원이 들어있다. 캐나다 출신의 가수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코언은 시집을 열 권 넘게 낸 시인이며 소설도 썼다. 가수로는 1967년 서른셋이 되던 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다. 그는 6,70년대 싱어송라이터의 거장이었다.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 정도다.
스타트 어게인, 다시 시작해봐요!
간결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이 한마디는 코언이 1992년에 발표한 〈삶의 찬가Anthem〉에 나온다. 이 노래는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한 편의 시다.
하루가 깨어나는 아침에
새들이 노래했어
다시 시작해 봐!
새들은 아침마다 노래한다. 하지만 누구나 새들의 노래를 듣는 건 아니다. 욕망에 집착하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겐 새들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새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귀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들린다. 새들이 상징하는 천사들의 소리 말이다. 하루가 깨어나고 있어. 오늘이 시작됐어.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어. 살아야 할 날은 오늘뿐이야. 그러니 다시 시작해 봐.
새들은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새들은 말하는 것 같았어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다, 후회와 걱정은 현재의 행복을 갉아먹는 좀벌레다. 현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용한 유일한 시간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상 모든 생명체 중 유독 인간만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다. 후회와 걱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동안 불행과 고통은 삶의 시간 전부를 삼켜버린다.
이뿐 아니다. 후회와 걱정은 현재의 행복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마저 빼앗는다. 그런데 평화 없이 살 수 없기에 사람들은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한다. 하고잡이가 되어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일한다. 무언가(물건, 상품, 주식, 부동산 등)를 끊임없이 사고판다.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고 삶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한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쌓이면서 기괴한 일이 벌어진다.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새들은, 천사들은 인간사회의 이러한 모순을 이렇게 탄식한다.
아, 사람들은 또 전쟁을 벌여 싸우고 또 싸우겠지
성스러운 평화의 비둘기는 다시 붙잡힐 거고
샀다가 다시 팔고, 팔았다가 다시 사는 동안
평화의 비둘기가 자유롭게 나는 일은 없겠지
Leonard Cohen - Anthem (Live In London) (Official Video)Listen on Spotify: http://smarturl.it/lc_spotify Listen on Apple Music: http://smarturl.it/lc_apple...
www.youtube.com
〈삶의 찬가〉의 백미는 후렴구다.
종을 울려야 해, 아직 울릴 수 있을 때에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
금이 가지 않은 건 없어, 모든 것엔 금이 가 있어
하지만 빛은 금을 통해 들어오지
새들은, 천사들은 왜 종을 울리라고 했을까? 종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다. 과거의 종소리는 사라졌고, 미래의 종소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뿐이다. 아니 종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만 현재에 머물 수 있다. 종소리는 우리를 현재로 초대하는 신성한 소리다. 그 소리를 울려야 하고, 들어야 한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선 그 소리가 이미 울리고 있다. 그 내면의 종소리를 경청할 때 우리는 후회와 걱정에서 벗어나 삶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후회의 잔향이 남아있는 삶을 긍정하고,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을 환대한다. 하므로 종을 울려야 한다. 이미 울리고 있는 내면의 신성한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현재에 충실할 수 있고, 희망의 종소리를 울릴 수 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야 한다. 새들이, 천사들이,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요청이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은 제사드릴 때 지켜야 하는 율법규정이었다.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라.”(레 1:3) 흠 없이 완벽한 제물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녀야 마땅한 종교적 예의다. 하나님께 완벽한 제물을 바치고 싶은 심정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태도의 문제지 절대 규범과 당위가 되는 순간 사람을 옥죈다.
완벽한 제물에 대한 강박이 율법, 교리, 윤리, 도덕, 규범, 당위, 책임, 의무의 형태로 부과될 때 삶은 병들고 만다. 성적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실적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직장인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처럼, 성장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목회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사랑의 가면을 쓰고 연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며, 신앙의 가면을 쓰고 신자들에게 헌신을 강요하기도 한다. 다양한 형태의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는 사람의 가슴에 비난과 정죄의 칼을 꽂는다.
그런데 새들은, 천사들은,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명령한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 흠 좀 있어도 돼, 실패 좀 해도 돼, 바보 같아도 돼. 복음은 지속적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탕자에게도, 간음한 여자에게도,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완벽한 제물이 되려고 하지 마! 완벽하지 않다고 미안해하지 마!
〈삶의 찬가〉의 절정은 마지막 한 마디다. 복음이 바리사이적 율법의 감옥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선언하듯, 이 노래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금이 가지 않은 건 없어, 모든 것엔 금이 있어.
하지만 햇빛은 금을 통해 들어오지.
There is a crack,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금은 거북의 등에 있는 무늬처럼 갈라지지 않고 터지기만 한 균열이다. 세월은 완전해 보이던 것에 금이 가게 한다. 우아한 도자기에도 금이 가고, 아름다운 꽃병에도 금이 간다. 금 간 것은 무가치하다, 고 우린 생각한다. 불완전하니까. 그러면 불완전한 것들은, 금이 가고, 금이 벌어져 틈이 생기고, 흠이 나고, 생채기 난 것들은 언제나 쓸모없는 것일까.
자식들을 위해 동물적 본능으로 험악한 세월을 버틴 어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엔 주름이라는 금이 가 있다. 식솔들을 먹여 살리느라 중노동에 시달린 아버지들의 딱딱한 발바닥엔 삶의 무게라는 금이 가 있다. 평생 땅을 파고 잡초를 맨 농부들의 손가락엔 고된 노동의 금이 가 있다. 상사의 갑질을 맨몸으로 견뎌야 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엔 상한 자존심이라는 금이 가 있다. 사랑을 믿고 모든 것 바친 가슴엔 연인의 배반이라는 금이 가 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겐 날벼락이라는 금이 가 있다. 나름 살아보겠다고 애썼는데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순진한 사람들의 가슴엔 실패감이라는 금이 가 있다.
이런 금들이 무가치할까.
킨츠쿠로이金繕い라는 공예기법이 있다고 한다. “킨”은 금金을 뜻하고, “츠쿠로이”繕い는 수선한다는 뜻이다. 깨져서 쓸모없어진 조각들을 접착제로 복원하는 일본의 전통공예기술이다. 깨진 그릇을 고쳐 쓸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에 생긴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접착제에 금을 섞어서 깨진 조각들을 붙이면서 예술로 승화되었다. 킨츠쿠로이 기법은 깨진 자국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릇의 상처를 예술적 무늬로 변형시킨다. 실패와 희생이 남긴 생의 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프고 슬퍼도 은총은 그것들을 빛나는 삶의 무늬로 재창조한다. 킨츠쿠로이의 영성 또는 불완전함의 영성이라고나 할까.
어렸을 때 잡동사니를 쟁여두는 광에서 놀다가 문이 닫혀 갇힌 적이 있다. 공포에 떨면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붕에 덧댄 갈라진 나무판자 틈새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을 조명처럼 받으며 알몸을 드러낸 먼지 알갱이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잠시 나는 황홀했고 두려움을 잊었다.
갈라진 나무판자도 한때는 반듯하게 제재된 목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금이 가고, 금이 벌어져 틈이 생겼을 것이다. 그 틈은 나무 입장에서 보면 상처겠지만 햇빛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드러낼 최적의 통로일 것이다. 그 틈이 없었다면 아무리 찬란한 햇빛이라도 허공을 헤맸을 것이다. 나무에 상처 난 틈을 통해 햇빛은 들어왔고, 광에 갇힌 소년은 공포를 잊었다.
은총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 갈라진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듯 은총은 그렇게 상처를 통해 현존한다. 사실 금도 틈도 흠도 없는 사람에겐 은총이 필요 없다. 실패도 상처도 죄도 없는 사람도 은총이 필요 없다. 은총은 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며, 놀랍게도 언제나 흠을 통해 들어온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그게 신앙의 신비다. 아, 완전이 불완전을 통해 틈입하는 신비여!
은총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 갈라진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듯 은총은 그렇게 상처를 통해 현존한다. 은총은 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며, 놀랍게도 언제나 흠을 통해 들어온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그게 신앙의 신비다. 아, 완전이 불완전을 통해 틈입하는 신비여!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꿰뚫어 본 사람이다. 그는 한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는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려고 날뛰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달릴 때 예수님을 만났고, 그토록 증오하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훗날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을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딤전 1:13.15) 이런 경험을 했기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롬 5:20) 하여, 〈삶의 찬가〉는 이렇게 노래를 끝맺는다.
완벽해지진 않아도
깨진 조각들을 붙일 수는 있어
찢어진 작은 북을 치면서도
행진은 할 수 있어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상처투성이야
- 이민재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라.
(레 1:3)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롬 5:20)
스타트 어게인, 다시 시작해 봐!
이 말에는 실패한 사람에 대한 격려가 들어있다.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에 대한 응원이 들어있다. 캐나다 출신의 가수 레너드 코언Leonard Cohen의 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코언은 시집을 열 권 넘게 낸 시인이며 소설도 썼다. 가수로는 1967년 서른셋이 되던 해,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했다. 그는 6,70년대 싱어송라이터의 거장이었다.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201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 정도다.
스타트 어게인, 다시 시작해봐요!
간결하면서도 가슴을 파고드는 이 한마디는 코언이 1992년에 발표한 〈삶의 찬가Anthem〉에 나온다. 이 노래는 상징과 은유가 풍부한 한 편의 시다.
하루가 깨어나는 아침에
새들이 노래했어
다시 시작해 봐!
새들은 아침마다 노래한다. 하지만 누구나 새들의 노래를 듣는 건 아니다. 욕망에 집착하거나 절망에 빠진 사람에겐 새들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새들의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귀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들린다. 새들이 상징하는 천사들의 소리 말이다. 하루가 깨어나고 있어. 오늘이 시작됐어.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어. 살아야 할 날은 오늘뿐이야. 그러니 다시 시작해 봐.
새들은 인간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새들은 말하는 것 같았어
지나간 일을 후회하거나
오지 않은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다, 후회와 걱정은 현재의 행복을 갉아먹는 좀벌레다. 현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용한 유일한 시간이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구상 모든 생명체 중 유독 인간만이 지나간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다. 후회와 걱정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동안 불행과 고통은 삶의 시간 전부를 삼켜버린다.
이뿐 아니다. 후회와 걱정은 현재의 행복뿐 아니라 마음의 평화마저 빼앗는다. 그런데 평화 없이 살 수 없기에 사람들은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한다. 하고잡이가 되어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일한다. 무언가(물건, 상품, 주식, 부동산 등)를 끊임없이 사고판다.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고 삶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한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쌓이면서 기괴한 일이 벌어진다.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새들은, 천사들은 인간사회의 이러한 모순을 이렇게 탄식한다.
아, 사람들은 또 전쟁을 벌여 싸우고 또 싸우겠지
성스러운 평화의 비둘기는 다시 붙잡힐 거고
샀다가 다시 팔고, 팔았다가 다시 사는 동안
평화의 비둘기가 자유롭게 나는 일은 없겠지
Leonard Cohen - Anthem (Live In London) (Official Video)Listen on Spotify: http://smarturl.it/lc_spotify Listen on Apple Music: http://smarturl.it/lc_ap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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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찬가〉의 백미는 후렴구다.
종을 울려야 해, 아직 울릴 수 있을 때에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
금이 가지 않은 건 없어, 모든 것엔 금이 가 있어
하지만 빛은 금을 통해 들어오지
새들은, 천사들은 왜 종을 울리라고 했을까? 종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다. 과거의 종소리는 사라졌고, 미래의 종소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언제나 현재뿐이다. 아니 종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만 현재에 머물 수 있다. 종소리는 우리를 현재로 초대하는 신성한 소리다. 그 소리를 울려야 하고, 들어야 한다.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선 그 소리가 이미 울리고 있다. 그 내면의 종소리를 경청할 때 우리는 후회와 걱정에서 벗어나 삶을 있는 그대로 대면한다. 후회의 잔향이 남아있는 삶을 긍정하고, 걱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삶을 환대한다. 하므로 종을 울려야 한다. 이미 울리고 있는 내면의 신성한 종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현재에 충실할 수 있고, 희망의 종소리를 울릴 수 있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야 한다. 새들이, 천사들이,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의 요청이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은 제사드릴 때 지켜야 하는 율법규정이었다. “바치는 제물이 소를 번제물로 바치는 것이면, 흠 없는 수컷을 골라서 회막 어귀에서 바치되,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라.”(레 1:3) 흠 없이 완벽한 제물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녀야 마땅한 종교적 예의다. 하나님께 완벽한 제물을 바치고 싶은 심정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태도의 문제지 절대 규범과 당위가 되는 순간 사람을 옥죈다.
완벽한 제물에 대한 강박이 율법, 교리, 윤리, 도덕, 규범, 당위, 책임, 의무의 형태로 부과될 때 삶은 병들고 만다. 성적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처럼, 실적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직장인들을 피곤하게 하는 것처럼, 성장이라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목회자들을 지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가 사랑의 가면을 쓰고 연인에게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며, 신앙의 가면을 쓰고 신자들에게 헌신을 강요하기도 한다. 다양한 형태의 완벽한 제물에 대한 요구는 사람의 가슴에 비난과 정죄의 칼을 꽂는다.
그런데 새들은, 천사들은, 그들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은 명령한다. “흠 없는 완벽한 제물일랑 잊어버려!” 흠 좀 있어도 돼, 실패 좀 해도 돼, 바보 같아도 돼. 복음은 지속적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 탕자에게도, 간음한 여자에게도,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완벽한 제물이 되려고 하지 마! 완벽하지 않다고 미안해하지 마!
〈삶의 찬가〉의 절정은 마지막 한 마디다. 복음이 바리사이적 율법의 감옥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선언하듯, 이 노래는 흠 없는 완벽한 제물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한다.
금이 가지 않은 건 없어, 모든 것엔 금이 있어.
하지만 햇빛은 금을 통해 들어오지.
There is a crack,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금은 거북의 등에 있는 무늬처럼 갈라지지 않고 터지기만 한 균열이다. 세월은 완전해 보이던 것에 금이 가게 한다. 우아한 도자기에도 금이 가고, 아름다운 꽃병에도 금이 간다. 금 간 것은 무가치하다, 고 우린 생각한다. 불완전하니까. 그러면 불완전한 것들은, 금이 가고, 금이 벌어져 틈이 생기고, 흠이 나고, 생채기 난 것들은 언제나 쓸모없는 것일까.
자식들을 위해 동물적 본능으로 험악한 세월을 버틴 어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엔 주름이라는 금이 가 있다. 식솔들을 먹여 살리느라 중노동에 시달린 아버지들의 딱딱한 발바닥엔 삶의 무게라는 금이 가 있다. 평생 땅을 파고 잡초를 맨 농부들의 손가락엔 고된 노동의 금이 가 있다. 상사의 갑질을 맨몸으로 견뎌야 하는 직장인들의 마음엔 상한 자존심이라는 금이 가 있다. 사랑을 믿고 모든 것 바친 가슴엔 연인의 배반이라는 금이 가 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에겐 날벼락이라는 금이 가 있다. 나름 살아보겠다고 애썼는데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순진한 사람들의 가슴엔 실패감이라는 금이 가 있다.
이런 금들이 무가치할까.
킨츠쿠로이金繕い라는 공예기법이 있다고 한다. “킨”은 금金을 뜻하고, “츠쿠로이”繕い는 수선한다는 뜻이다. 깨져서 쓸모없어진 조각들을 접착제로 복원하는 일본의 전통공예기술이다. 깨진 그릇을 고쳐 쓸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에 생긴 생존의 기술이었다. 그런데 접착제에 금을 섞어서 깨진 조각들을 붙이면서 예술로 승화되었다. 킨츠쿠로이 기법은 깨진 자국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릇의 상처를 예술적 무늬로 변형시킨다. 실패와 희생이 남긴 생의 금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아프고 슬퍼도 은총은 그것들을 빛나는 삶의 무늬로 재창조한다. 킨츠쿠로이의 영성 또는 불완전함의 영성이라고나 할까.
어렸을 때 잡동사니를 쟁여두는 광에서 놀다가 문이 닫혀 갇힌 적이 있다. 공포에 떨면서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지붕에 덧댄 갈라진 나무판자 틈새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을 조명처럼 받으며 알몸을 드러낸 먼지 알갱이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잠시 나는 황홀했고 두려움을 잊었다.
갈라진 나무판자도 한때는 반듯하게 제재된 목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금이 가고, 금이 벌어져 틈이 생겼을 것이다. 그 틈은 나무 입장에서 보면 상처겠지만 햇빛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드러낼 최적의 통로일 것이다. 그 틈이 없었다면 아무리 찬란한 햇빛이라도 허공을 헤맸을 것이다. 나무에 상처 난 틈을 통해 햇빛은 들어왔고, 광에 갇힌 소년은 공포를 잊었다.
은총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 갈라진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듯 은총은 그렇게 상처를 통해 현존한다. 사실 금도 틈도 흠도 없는 사람에겐 은총이 필요 없다. 실패도 상처도 죄도 없는 사람도 은총이 필요 없다. 은총은 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며, 놀랍게도 언제나 흠을 통해 들어온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그게 신앙의 신비다. 아, 완전이 불완전을 통해 틈입하는 신비여!
은총은 홀로 일하지 않는다. 갈라진 틈으로 햇빛이 들어오듯 은총은 그렇게 상처를 통해 현존한다. 은총은 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며, 놀랍게도 언제나 흠을 통해 들어온다. 기막힌 역설이지만 그게 신앙의 신비다. 아, 완전이 불완전을 통해 틈입하는 신비여!
사도 바울은 이 신비를 꿰뚫어 본 사람이다. 그는 한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자부했었다. 그러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는 살기가 등등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려고 날뛰었다. 그러다가 다마스쿠스를 향해 달릴 때 예수님을 만났고, 그토록 증오하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훗날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생을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딤전 1:13.15) 이런 경험을 했기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롬 5:20) 하여, 〈삶의 찬가〉는 이렇게 노래를 끝맺는다.
완벽해지진 않아도
깨진 조각들을 붙일 수는 있어
찢어진 작은 북을 치면서도
행진은 할 수 있어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은
상처투성이야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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