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양과 염소, 그리고 임금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94회 작성일 23-11-27 15:31본문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마 25:37-39)
모든 일엔 평가가 따른다. 학생들은 성적으로 학업을 평가받고, 직장인들은 실적으로 업무를 평가받는다. 삶은 평가의 연속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쁘고, 나쁜 평가를 받으면 실망스럽다.
성경은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을 “양”에 빗댄다. 양은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로 “창세 때부터 준비한 나라를 차지한다.”(마 25:34) 그게 바로 “천국”이다. 좋은 평가를 받아 복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며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을 성경은 “염소”에 빗대면서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에겐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간다.”(마 25:41) 즉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이것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겪는 일이다. 이러한 지옥은 정치나 경제를 포함한 생활현실(R1)에서 수없이 일어난다. 요즘이 그렇다.
바깥의 그리스도, 보잘것없는 사람들
평가에는 평가의 대상뿐 아니라 평가의 주체도 있다. 그러면 삶에 대한 평가의 주체는 누구일까? “인자” 곧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그리고 평가에는 기준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가 기준은 뭘까? 그건 성적이나 실적, 재산이나 학벌, 지위나 권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가(그리스도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둘째,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셋째,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였는가?
넷째,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다섯째,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는가?
여섯째,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는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좋은 평가를 받은 “양들” 곧 “의인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그들의 말엔 그리스도에게 직접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겸양이 들어 있다. 그러자 주님은 놀라운 말을 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 40)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삶의 평가 기준은 “염소들” 즉 “저주받은 자들”에게도 똑같다. 평가 기준은 누구에게나 똑같아야 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잇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다.”(마 25:42-43)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들도 똑같은 잣대로 평가받았다.
그러자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봐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들의 물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라는 변명이 들어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똑같이 대꾸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 40)
우리는 이 단순 명쾌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좋은 평가를 받는 삶, 즉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여기며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사는 비결이다. 삶의 행복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돌보는 것과 직결된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지 않는 행복은 찜찜하다.
은명교회의 예배 장소를 봉헌하신 김경희 장로님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백 세 넘어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언젠가 건강의 비결을 묻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봉사가 건강의 비결인 거 같아요.” 그러면서 소년처럼 웃으셨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읽는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섬기는 삶이 행복의 비결인 거 같아요.”
요즘 따라 유독 세월호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하면 천국의 삶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기도하며 찾는 중이다. 함께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벗들의 주위에도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 자꾸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들 말이다. 가족과 친지 중에도 있을 것이며, 친구와 지인들 가운데도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하고 동행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 천국을 사는 비결이다.
내면의 그리스도, 참자아라는 임금
하지만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처지가 꼭 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쓸쓸하고 외롭다. 그리스도인들이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살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참자아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참자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속인들은 물론 종교인들도, 평신도들은 물론 목회자들도 예외가 없다. 온통 겉사람 가꾸기 일색이다. 외모의 빼어남과 모자람, 외형의 화려함과 초라함, 양과 수의 많고 적음, 공간의 크고 작음이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런 평가에 따라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진다. 거짓자아의 허영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다. 이런 삶이 행복할 리 없다.
요즘 모든 사람의 참자아가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 참자아가 관심에 목말라 하고 있다. 참자아가 은총의 옷을 입지 못해 헐벗고 있다. 참자아가 길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하고 있다. 참자아가 외면과 방치로 병들어 있다. 참자아가 거짓자아의 감옥에서 질식하고 있다. 아, 수많은 그리스도가 죽어가고 있다. 존엄해야 할 존재가 거지꼴이다!
성경은 인자 곧 그리스도를 “임금”이라고 표현한다.(마 25:34) 참자아의 원형인 그리스도가 임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각 사람의 참아자는 임금의 분신이다. 바로 이 참자아라는 내면의 임금을 존중해야 한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연인처럼 환대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야 하고, 건강하게 해야 하고,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고(엡 3:16),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고(벧전 3:4),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성하라고(갈 4:19)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참자아라는 내면의 임금을 존중해야 한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연인처럼 환대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야 하고, 건강하게 해야 하고,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로 태어났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평등한 게 있다. 그게 바로 “참자아”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도 좋다.) 참자아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외모와 학벌을 따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평하고 한탄하기 이전에 참자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말씀과 진리의 양식을 굶주린 참자아에 공급해야 한다. 성령의 생수를 목마른 참자아가 마시게 해야 한다. 나그네를 영접하듯 참자아를 환대해야 한다. 참자아에 새사람의 옷을 입혀야 한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듯 참자아를 건강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거짓자아의 감옥에서 참자아를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가 내면의 임금인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면 삶이 달라진다. 혁명이 시작된다. 게으름이 부지런함으로, 악습이 거룩한 습관으로, 무기력이 열정으로, 무관심이 연민으로, 불평이 감사로, 나태가 훈련으로, 조급함이 오래 참음으로, 욕망이 생명력으로, 무지가 창조성으로 변형된다. 하여, 삶의 빛깔이 달라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밝아지고, 무미건조한 관계에 설렘이 깃든다.
무엇보다 이때 생활현실에서 만나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섬기게 된다. 참자아 곧 내면의 임금을 존중하는 사람이 지금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그리스도들(임금들)을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섬김은 업적을 쌓기 위한 봉사도 아니며,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희생도 아니다. 내면의 그리스도와 외부의 그리스도, 내면의 임금과 외부의 임금 사이의 즐거운 만남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과 섬김의 철학이다.
임금들이 만날 때 만찬이 이뤄지고, 천국의 향연이 벌어진다. 내면의 가난한 임금인 참자아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생활현실의 가난한 임금인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을 섬길 때 일어나는 천국 잔치다.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때의 섬김은 업적을 쌓기 위한 봉사도 아니며,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희생도 아니다. 내면의 그리스도와 외부의 그리스도, 내면의 임금과 외부의 임금 사이의 즐거운 만남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과 섬김의 철학이다.
- 이민재
(마 25:37-39)
모든 일엔 평가가 따른다. 학생들은 성적으로 학업을 평가받고, 직장인들은 실적으로 업무를 평가받는다. 삶은 평가의 연속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기쁘고, 나쁜 평가를 받으면 실망스럽다.
성경은 좋은 평가를 받은 사람을 “양”에 빗댄다. 양은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로 “창세 때부터 준비한 나라를 차지한다.”(마 25:34) 그게 바로 “천국”이다. 좋은 평가를 받아 복을 받은 사람들은 천국을 누리며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을 성경은 “염소”에 빗대면서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그들에겐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간다.”(마 25:41) 즉 악마들이 들끓는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이것도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겪는 일이다. 이러한 지옥은 정치나 경제를 포함한 생활현실(R1)에서 수없이 일어난다. 요즘이 그렇다.
바깥의 그리스도, 보잘것없는 사람들
평가에는 평가의 대상뿐 아니라 평가의 주체도 있다. 그러면 삶에 대한 평가의 주체는 누구일까? “인자” 곧 그리스도께서 하신다. 그리고 평가에는 기준이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가 기준은 뭘까? 그건 성적이나 실적, 재산이나 학벌, 지위나 권력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평가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내가(그리스도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둘째,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셋째, 내가 나그네로 있을 때 영접하였는가?
넷째, 내가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는가?
다섯째,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는가?
여섯째,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는가?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좋은 평가를 받은 “양들” 곧 “의인들”은 의아하다는 듯이 되묻는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그들의 말엔 그리스도에게 직접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겸양이 들어 있다. 그러자 주님은 놀라운 말을 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 40)
이 말씀이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과 동일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삶의 평가 기준은 “염소들” 즉 “저주받은 자들”에게도 똑같다. 평가 기준은 누구에게나 똑같아야 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로 잇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주지 않았다.”(마 25:42-43)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들도 똑같은 잣대로 평가받았다.
그러자 나쁜 평가를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봐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이들의 물음에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라는 변명이 들어 있다. 그러자 예수님은 똑같이 대꾸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 40)
우리는 이 단순 명쾌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좋은 평가를 받는 삶, 즉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여기며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사는 비결이다. 삶의 행복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돌보는 것과 직결된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연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지 않는 행복은 찜찜하다.
은명교회의 예배 장소를 봉헌하신 김경희 장로님은 천수(天壽)를 누리고 백 세 넘어서 하늘나라에 가셨다. 언젠가 건강의 비결을 묻자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봉사가 건강의 비결인 거 같아요.” 그러면서 소년처럼 웃으셨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읽는다. “보잘것없는 사람을 섬기는 삶이 행복의 비결인 거 같아요.”
요즘 따라 유독 세월호의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자꾸 생각난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하면 천국의 삶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기도하며 찾는 중이다. 함께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벗들의 주위에도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들, 자꾸 눈에 밟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나그네 된 사람들, 헐벗은 사람들, 병든 사람들, 감옥에 갇힌 사람들, 이 시대에 강도 만난 사람들 말이다. 가족과 친지 중에도 있을 것이며, 친구와 지인들 가운데도 있을 것이다. 그들과 함께하고 동행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 천국을 사는 비결이다.
내면의 그리스도, 참자아라는 임금
하지만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처지가 꼭 이와 같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예수를 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쓸쓸하고 외롭다. 그리스도인들이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살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참자아를 외면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참자아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속인들은 물론 종교인들도, 평신도들은 물론 목회자들도 예외가 없다. 온통 겉사람 가꾸기 일색이다. 외모의 빼어남과 모자람, 외형의 화려함과 초라함, 양과 수의 많고 적음, 공간의 크고 작음이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다. 그런 평가에 따라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진다. 거짓자아의 허영과 허위의식에 사로잡힌다. 이런 삶이 행복할 리 없다.
요즘 모든 사람의 참자아가 사랑에 굶주리고 있다. 참자아가 관심에 목말라 하고 있다. 참자아가 은총의 옷을 입지 못해 헐벗고 있다. 참자아가 길 잃은 나그네처럼 방황하고 있다. 참자아가 외면과 방치로 병들어 있다. 참자아가 거짓자아의 감옥에서 질식하고 있다. 아, 수많은 그리스도가 죽어가고 있다. 존엄해야 할 존재가 거지꼴이다!
성경은 인자 곧 그리스도를 “임금”이라고 표현한다.(마 25:34) 참자아의 원형인 그리스도가 임금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각 사람의 참아자는 임금의 분신이다. 바로 이 참자아라는 내면의 임금을 존중해야 한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연인처럼 환대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야 하고, 건강하게 해야 하고,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고(엡 3:16),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고(벧전 3:4),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성하라고(갈 4:19) 했을 것이다.
바로 이 참자아라는 내면의 임금을 존중해야 한다.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연인처럼 환대하고, 빛나는 옷을 입혀야 하고, 건강하게 해야 하고, 감옥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세상이 불평등하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금수저가 아니라 흙수저로 태어났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평등한 게 있다. 그게 바로 “참자아”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도 좋다.) 참자아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외모와 학벌을 따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평하고 한탄하기 이전에 참자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말씀과 진리의 양식을 굶주린 참자아에 공급해야 한다. 성령의 생수를 목마른 참자아가 마시게 해야 한다. 나그네를 영접하듯 참자아를 환대해야 한다. 참자아에 새사람의 옷을 입혀야 한다. 속사람을 강건케 하듯 참자아를 건강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거짓자아의 감옥에서 참자아를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가 내면의 임금인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면 삶이 달라진다. 혁명이 시작된다. 게으름이 부지런함으로, 악습이 거룩한 습관으로, 무기력이 열정으로, 무관심이 연민으로, 불평이 감사로, 나태가 훈련으로, 조급함이 오래 참음으로, 욕망이 생명력으로, 무지가 창조성으로 변형된다. 하여, 삶의 빛깔이 달라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밝아지고, 무미건조한 관계에 설렘이 깃든다.
무엇보다 이때 생활현실에서 만나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참사랑으로 섬기게 된다. 참자아 곧 내면의 임금을 존중하는 사람이 지금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그리스도들(임금들)을 진심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섬김은 업적을 쌓기 위한 봉사도 아니며,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희생도 아니다. 내면의 그리스도와 외부의 그리스도, 내면의 임금과 외부의 임금 사이의 즐거운 만남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과 섬김의 철학이다.
임금들이 만날 때 만찬이 이뤄지고, 천국의 향연이 벌어진다. 내면의 가난한 임금인 참자아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생활현실의 가난한 임금인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을 섬길 때 일어나는 천국 잔치다.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이때의 섬김은 업적을 쌓기 위한 봉사도 아니며,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희생도 아니다. 내면의 그리스도와 외부의 그리스도, 내면의 임금과 외부의 임금 사이의 즐거운 만남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이웃 사랑과 섬김의 철학이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